많은 한국 교회 목사님들이 반공에 대해 지나친 논리를 가지고 주장하는 이유를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교회와 반공주의
조용훈(한남대 기독교학과 교수)
1. 서론
2. 한국교회 반공주의 형성의 역사
1) 해방 전 한국교회와 공산주의
2) 해방 후 기독교와 반공주의
3) 한국전쟁과 반공주의
4) 1960년대 한국교회 내의 용공(容共)논쟁
5) 2000년대의 한국교회와 반공주의
3. 결론: 과제와 전망
1) 정치사회적 현실의 변화와 도전
2) 기독교 복음의 의미
1. 서론
한국교회(개신교)는 냉전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민족의 통일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민족화합의 장애물이 될 것인가? 흔히, 사람들은 독일의 통일과 독일교회의 역할을 이야기하면서 한국교회에 대해서도 비슷한 기대를 하고 있다. 독일교회는 통일 이전만이 아니라 정치적 통일 이후에도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사회나 교회와 독일 사회나 교회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두 교회는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난다.
세계는 1990년대 들어 탈냉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반공주의는 더 이상 금기(taboo)가 아니다. 우리사회에서도 7.4 남북성명 이후 반공주의가 급격히 약화되고 있으며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붉은 색 유니폼의 유행은 빨갱이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해가고 있는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땅에는 아직도 냉전의 어두운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고 있지 않다. 물론 과거에 비하면 훨씬 그 강도가 약화되긴 했어도 여전히 분단을 고착화하고 정치사회적 이데올로기 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거기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한국교회의 완고한 태도도 한 몫을 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반공주의는 과거의 상처들로 인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최근 들어 한국사회에서 반공주의의 퇴조와는 반대로 정치사회적 보수주의와 신학적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는 상당수의 한국교회에서는 오히려 반공주의가 더욱 강화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런 한국교회를 두고 십계명 외에도 또 하나의 계명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반공’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조차 있다. 문제는 이런 극단적 반공주의가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고착시키고, 남남 갈등까지 일으킬 수 있다는데 있다. 민족의 통일과 사회의 통합에 영향을 미치는 반공주의에 대한 한국교회의 태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아래에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반공주의의 배경을 역사적, 신학적 관점에서 추적하고자 한다.
2. 한국교회 반공주의 형성의 역사
1) 해방 전 한국교회와 공산주의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사상은 일제의 식민지 상황에서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민족주의와 자연스럽게 조화 될 수 있었다. 일본제국주의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사회주의자들과 기독교 지도자들 사이에 특별한 갈등은 없었다. 그 예로, 새문안교회 장로였던 김규식이나 평양장로회신학교와 중국 남경 금능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던 여운형, 그리고 전도사로 활동했던 이동휘 같은 신앙인 모두 사회주의 사상과 아무런 갈등을 느끼지 못했다. 해방 후에도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세력은 공산당에 대항하는 기독교 사회민주당을 조직하였고, 신의주반공학생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민족 독립에 대한 기독교의 소극적 태도에 실망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1918년 6월 러시아 하바로브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창당하고 이듬해 4월 블라디보스톡에서 ‘고려공산당’을 창당한 이동휘였다. 사회주의자들은 1925년 조선 공산당을 결성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개신교에 대한 비판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반(反)기독교 대강연회’를 개최하거나 12월 25일을 ‘반(反)기독교의 날’로 정하는 등 노골적으로 반(反)기독교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1925년 9월에 중국 길림성에 선교사로 활동하던 윤학영, 김이주 등 네 사람이 ‘일본의 밀정’이라는 죄목으로 공산당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1932년 10월에는 중국 연길현 종성동에서 목회하던 김영진 목사와 그의 동생 김영국 장로가 공산당원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비슷한 유형의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게 되면서 장로교회 총회가 송창근 목사로 하여금 현지시찰 후 보고토록 하는데 보고서에는 이렇게 당시 상황이 보고되고 있다:
“북만교회는 순교의 피로 쌓은 교회다... 잔악을 극한 공산당에게 몽치에 맞아 죽은 순교자, 정수리에 못 박혀 죽은 순교자, 머리 가죽을 벗겨 죽은 순교자, 말 못할 학살을 당한 여 순교자, 기십 기백에 달하였다 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기구인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1932년 9월에 제9차 모임에서 <사회신조>를 채택하는데 거기에는 ‘일체의 유물교육, 유물사상, 계급적 투쟁, 혁명수단에 의한 사회개조와 반동적 탄압에 반대한다’는 조항을 명기하면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교회의 입장을 분명히 하게 된다.
2) 해방 후 기독교와 반공주의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면서 남한에는 미군이 군정을 실시하게 된다. 한반도를 이데올로기의 전쟁터로 규정한 미군정은 좌경화된 남한사회의 이데올로기 지형을 우익 주도의 지형으로 변경하는데 노력했다. 그들은 소련의 영토적 야욕과 전체주의적 이미지를 강조하면서 좌익 세력을 싸잡아 소련의 하수인으로 몰아붙였다. 미 군정청은 기독교인들을 가장 우호적인 협력자로 생각하여 주요 직책에 임명했다. 1945년 10월 5일, 미 군정청이 임명한 한국인 행정관 11명 중에서 6명이 개신교인이었는데 그 가운데 3명은 목사였다. 그리고 1946년에서 1947년 사이에 임명된 한국인 고위관료 가운데 50% 이상이 개신교인이었다. 이렇게 남한에서 기독교와 미 군정청이 긴밀했던 것은 반공이라는 점에서 공통의 관심사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미국의 후원 아래 정치적 주도권을 잡은 이승만은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면서 반공 보수 우익의 권력구도를 만들어갔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첫째, 북한이 소련의 꼭두각시 정권이라는 점, 둘째, 북한은 공산당의 일당독재로 민주주의의 적이라는 점, 셋째, 북한주민도 남한에 의한 통일을 바란다는 점, 넷째, 중국공산당의 지재체제가 강화되기 이전에 분단상황이 철폐되어야 한다는 점을 논리적 바탕으로 삼았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안은 남에서는 우익이, 북에서는 좌익이 세력을 쥐게 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김구를 중심으로 여러 사회단체가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나섰지만 기독교계에서는 신탁통치안을 찬성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반공주의를 기본이념으로 하고 있던 김창준이 이끄는 ‘기독교민주동맹’이나 함태영이 주도한 ‘그리스도교도 연맹’이 그러한 찬성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다. 여운형, 김구, 김규식 같이 남북한 단정을 반대하고 좌우합작을 힘쓰던 중도적 혹은 좌파적 기독교 지도자들이 피살되거나 납북되면서 한국교회에는 우파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자연스럽게 반공주의적 태도가 굳어져갔다.
한편,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김일성을 앞세워 권력을 장악했다.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는 ‘민중의 아편’이며 부르주아 계급의 앞잡이였다. 저들은 ‘조선기독교도연맹’이라는 친(親)공산당 조직을 구성하고 교회와 대립할 목적으로 주일인 1946년 11월 3일에 공산당 정권을 세우기 위한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하기로 한다. 당연히 교회는 반대하게 되었고 수많은 교인들과 교회지도자들에 대한 박해의 빌미가 되었다. 한편, 김일성은 농지개혁을 통한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주력했는데, 이때 토지개혁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물적 기반을 빼앗기고 신앙 활동의 자유마저도 잃게 된 기독교인들이 월남(越南)을 결심하게 된다.
이후 한국교회의 반공주의는 이들 월남 기독교인들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일제하 개신교는 평안도와 황해도를 중심한 서북지방에 교세가 편중되어 있었다. 그런데 북한에서 소련군과 김일성 통치 아래 탄압을 받게 되자 개신교인의 1/3정도가 월남하게 된다. 나중 이들 월남 기독교인들이 남한에서 강력한 종교적 기반을 구축하고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교회의 반공주의도 굳어지게 되었다.
3) 한국전쟁과 반공주의
한국전쟁은 공산주의에 대한 한국교회의 적대적 태도와 증오심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 기간 중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남북한 지역에서 공산당원이나 공산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특히, 1948년 여순반란 사건 때 자신의 두 아들을 학교의 공산당 급우들에게 잃은 슬픔에도 불구하고 그 공산당 학생을 자신의 양아들로 삼은 손양원 목사를 공산군이 살해한 이야기는 한국교회가 왜 그렇게 반공주의를 떨쳐버리지 못하는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손양원 목사의 죽음에 관하여 김인서 목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6.25때 공산군은 손양원 목사 외 120여 명을 여수감옥에 수금하였다가 9월 28일 밤에 모두 한 줄에 묶어 가지고 미평 동산에 끌고 갔다. 발을 벗겨 40리 자갯돌 길에 걸리우니 발은 다 찢어져 피의 행로였다. 밤중에 10여 명씩 묶어서 꿇어앉히고 총으로 쏘고 칼로 찌르며 돌로 쳐서 죽었다. 그 중에 한두 사람이 살아남아서 그 밤의 참상을 전하여 주었다. 그 중에는 80세 된 목사도 있었고 여 전도사와 청년회 회장도 있었다.”
한국전쟁은 한국사회 전체에 커다란 피해를 주었다. 남한에서 150만 명, 북한에서 25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사회경제적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그 가운데 기독교가 입은 피해도 적지 않았다. 인적 피해만이 아니라 물적 피해도 심각했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되거나 실종된 목사나 교회 지도자들의 경우, 밝혀진 명단만 해도 북한교회의 162명, 남한교회의 150명에 이른다. 물적 피해와 관련해서는, 장로교 예배당 소실이 152동, 파손 467동, 그리고 감리교 예배당 소실이 84동, 파괴 155동, 그리고 성결교 예배당 소실이 27동, 파괴 79동에 이르렀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한국 기독교에 쉽게 지워지지 않을 심리적 상흔(트라우마)을 남겼다. 그 결과 남한교회는 전쟁 기간 중 대한기독교구국회를 구성하여 국방부와 긴밀한 연락을 가지면서 선무(宣撫), 구호, 방송 사업에 참여하였고 의용군 모집에도 협력했다. 전쟁 초기 3천여 명의 의용대를 모집하여 전투에 참가시켰고, 북한 점령 지역에 약 1천여 명의 선무원을 보내 활동하게 했다. 한국전쟁이 진행되면서 남한의 개신교회는 반공주의의 집결지요 공산주의 비판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공산주의는 점차 기독교인 사이에서 ‘사탄론’으로 신학화되고 교리화되었다. 말하자면, 공산주의자들은 종말론적 적그리스도인 사탄으로 묘사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붉은 말과 그 탄 자’요 ‘적그리스도’로 묘사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독교 지도자였던 한경직 목사가 공산주의를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는 데서도 그러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저들의 말 그대로 공산주의야말로 일대 괴물이다. 이 괴물이 지금은 3천리 강산에 횡행하며 삼킬 자를 찾는다. 이 괴물을 벨 자 누구냐? 이 사상이야말로 묵시록에 나오는 붉은 용이다. 이 용을 멸할 자 누구냐?”
이러한 신학적 이해에 기초하여 한국교회는 휴전반대운동에 나서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 악마와 타협하는 일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부의 북진멸공통일정책의 적극적 지지자가 된 한국교회는 한국전쟁 말기에 휴전을 강력하게 반대하게 된다. 1953년 6월 15일자로 ‘세계교회에 보내는 휴전반대 성명서’를 보면 “한국정부와 한국민은 일치하여 최근 판문점에서 진행되고 있는 휴전안에 대하여 한사코 반대하고 있으며 한국의 전 기독교도들도 또한 마귀의 승리를 초래할 휴전을 반대하는 기치를 높이 들고 나섰다”고 하면서, 통일은 “공산주의와의 유화에서가 아니라 공산주의를 굴복시킴으로써 성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날짜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낸 메시지에서도 이런 전투적 반공주의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각하의 관후하신 인간성은 ‘설복될 수 없는 마귀’를 ‘회개할 줄 아는 선의의 죄인’으로 관대 평가하였습니다. 한국민은 이론이나 정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생명과 바꿔 얻는 체험으로써 공산주의는 ‘영구히 회개할 수 없는 마귀’임을 증거 할 ‘산 증인’입니다. 이 산 증인은 판문점 휴전의 결과가 보다 큰 침략을 초래하여 한국을 파멸케 할 것이며 한국민의 정신적 지주인 기독교를 한국민의 마음속으로부터 탈거하여 갈 것이라는 사실을 주저 없이 각하 앞에 경고하는 바입니다.”
4) 1960년대 한국교회 내의 용공(容共)논쟁
이데올로기 문제는 한국 사회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해방 후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문제로 장로교로부터 고신파 장로교가 분열되고, 이후 장로교는 신학적 입장과 교회의 이데올로기 문제로 또 한 번의 분열을 겪게 된다. 근본주의 신학의 중심지였던 고려파(고신)에서는 1951년 7월에 있은 장로교총회에서 국회의원 22명의 명의로 한국의 장로교가 ‘용공단체’라고 비난하면서 자신들의 분리를 정당화했다.
한편, 한국교회는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WCC)와의 관계를 둘러싸고 또 한 차례 갈등을 겪게 된다. 사실 한국교회는 세계교회협의회 제1차 총회(1948)때부터 대표를 파송하고 있었다. 하지만 교회 내에는 WCC가 자유주의 신학일 뿐만 아니라 ‘용공(容共)적’이라는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세계교회협의회를 용공적이라고 비판했던 이유는 1968년 세계교회협의회 웁살라 총회에서 중공의 유엔 가입을 촉구하고 월남전에 반대한 것이 이유가 되었다. 그러면서 이들 비판세력은 진보적인 장로교회와의 분열을 정당화했다: “통합측에 지금은 용공 신(新)신학자가 없으나, 10년 후에는 용공 신(新)신학이 될 것이니 지금 미리 분열을 단행했다.”
이처럼 반공주의는 한국사회는 물론 한국교회 안에서조차 자신들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사람들과 싸우는 데 사용되는 효과적인 무기였다. 이것은 마치 1970년대 이후 군사정권이 정치적 비판세력을 억압하는데 있어서 사용한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의 기능과 같은 것이었다.
한국교회의 반공주의적 태도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입장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세계의 언론과 세계 교회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반대의 입장을 표현했지만 한국교회는 베트남 참전을 정당화했다. 한국교회는 베트남 전쟁을 공산주의와 자유세계 간의 대결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했던 것이다.
5) 2000년대의 한국교회와 반공주의
한국교회는 신학적 진보와 보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반공주의라는 차원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의 에큐메니칼적 신학적 입장을 따르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전신인 한국기독교연합회조차도 러시아정교회가 공산주의 국가 안에 있는 기독교라는 이유에서 1961년에 세계교회협의회 가입을 거부했으며, 반공을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5.16군사혁명을 지지하고,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적극 지지했다. 심지어 1972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7.4남북공동성명에 대한 성명서>에서조차 반공정신을 강조했다. 이 성명서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7.4남북공동성명이 남북 간의 긴장완화와 평화 통일에 긍정적 효과가 있을 것을 인정하면서도 “교회는 진정으로 반공의 자세를 견고히 하고, 앞으로 다가올 대결에 대비하여야 할 것”이며 “성급한 남북대화 때문에 반공적인 여론이 억압되는 경우에는 심히 우려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확고한 반공주의적 입장을 재확인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진보적인 그룹에 있어서 반공주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생겨나게 된 계기는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자신들의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이 ‘용공적’이라고 매도되고 억압되는 상황의 경험이었다. 대도시 공단지역의 노동자의 인권보호와 선교를 위해 설립되었던 도시산업선교회의 선교활동을 근로자를 선동해서 계급의식과 계급투쟁을 조장하는 것처럼 선동하였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에서 발전한 해방신학의 한국적 수용이라 할 수 있는 민중신학의 학문활동에 대해서조차 ‘용공’의 혐의를 씌우고, 1979년 4월에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과 같은 용공조작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반공이데올로기의 정치적 이용에 대해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같은 경험 후에 1980년대에 들어서자 한국교회의 진보진영은 공산주의에 대해 보다 더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하게 된다. 1983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 ‘통일문제협의회’가 설치되었고, 1985년 3월에 모인 제34차 총회에서는 ‘한국교회 평화통일 선언’을 채택하였다. 1986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는 교회신조 가운데 민족통일 문제가 최초로 포함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를 선포하였다. 한국교회는 국내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통일논의를 세계교회의 관심사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1984년 일본의 도잔소에서 세계교회협의회가 주최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정의에 관한 협의회’를 시작으로 하여, 드디어 1986년 9월 스위스 글리온에서 남북교회 대표들이 만나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관심의 성서적․신학적 근거’에 관한 세미나를 열게 되었다. 그러한 분위기가 무르익어 1988년 2월에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에 획기적인 진전을 가져왔던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선언’이 발표된다. ‘분단과 증오에 대한 죄책 고백’이라는 부분에서 선언문은 “우리는 갈라진 조국 때문에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을 미워하고 속이고 살인하였고, 그 죄악을 정치와 이념의 이름으로 오히려 정당화하는 이중의 죄를 범하여 왔다”는 것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특히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반공이데올로기를 종교적인 신념처럼 우상화하여 북한 공산정권을 적대시한 나머지 북한동포들과 우리와 이념을 달리하는 동포들을 저주하기까지 한 죄(요일 3:14-15, 4:20-21)를 범했음을 고백”하기까지 했다. 강인철의 평가대로, 이로써 비로소 한국교회가 반공주의와 공개적으로 결별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한국교회의 진보적인 신학적 입장을 견지하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속한 교회에 해당되는 것이었지만 그 사회적, 신학적 의미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편, 같은 시기에 한국교회의 보수진영은 ‘북한교회재건운동’이나 ‘북한동포돕기운동’과 같은 방식으로 통일문제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운동은 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점의 변화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다. 북한동포돕기운동만 보더라도 북한주민의 인권상황과 빈곤상황을 강조하면서 기독교의 자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북한사회에 대한 우월적 입장과 시혜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정치적 보수주의, 외교적 친미주의,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반공주의와 관련을 맺고 있는 보수적 성향의 한국교회의 입장과 태도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보다 더 공격적인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유신독재시절 이른바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우면서 억압적 정치현실에 눈을 감고,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던 진보진영의 교회를 향해 정치참여를 비판하던 보수적 성향의 교회와 지도자들이 각종 정치 현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정치적 표현과 행동을 하고 있다. 기독당의 창당이나 기독교사회책임 같은 단체의 구성이 그 예이다. 그리고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 때 인공기 방화사건이나 3.1절 시청 앞 집회, 그리고 6.25 국민대회에서는 공격적 반공주의를 표현하고 있다. 특히, 2003년 1월, 3월, 그리고 6월에 있은 대회에서는 친미 반공주의의 입장을 보다 명확히 했다. 이들은 북한이 악의 세력이고 미국은 정의의 사자이며 십자군이기 때문에 미국을 반대한다는 것은 곧 공산주의를 수용하는 것이며 이는 악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논리로 친미반공주의를 정당화했다.
3. 결론: 과제와 전망
1) 정치사회적 현실의 변화와 도전
한국교회의 반공주의는 일제시대 사회주의와의 갈등과정에서 생겨났고, 한국전쟁에서 강화되고 이후 고착화되었다. 한국교회에 있어서 공산주의는 악의 구체적 현실로서 사탄과 같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선과 악의 이원론에 기초하여 공산주의는 악이요 그 반대가 선이며, 따라서 공산주의와의 싸움을 거룩한 전쟁으로 이해한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형성된 이러한 전투적 반공주의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물론 한국교회는 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동안 사회주의자들과의 갈등과 대립 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상처는 때로 한국교회로 하여금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데 어려움을 주기도 한다. 상처가 너무 깊기 때문에 쉽게 공산주의에 대한 객관적 입장을 가지리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시대의 정치사회적 현실과 기독교 복음 진리는 전투적 반공주의에 대한 한국교회의 태도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분단의 고착세력이라는 오해를 벗고 평화통일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에 내면화된 반공주의에 대한 객관적 이해가 요청된다.
먼저, 우리의 정치사회적 현실은 공산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청하고 있다. 세계는 벌써부터 탈냉전구조의 사회로 진행해가고 있다. 게다가 한국사회 역시 반공주의가 급격히 퇴조하고 있다. 레드 콤플렉스는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에 의해 서서히 약화되거나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세계현실과 한국사회 현실과는 달리 한국교회에는 아직도 냉전적 사고방식이 존재하고 반공주의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되어 있다.
기독교의 복음은 가난한 자, 소외된 자에 관심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사상과도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사회주의가 약자에 대해 관심하는 기독교의 세속화된 표현 형태라고말하기도 한다. 물론 이론이 아닌 현실 사회주의, 특히 한국교회가 경험한 현실 공산주의와 기독교 사이에는 함께하기 어려운 많은 차이가 있다. 북한의 현실 공산주의의 무신론, 유물론, 혁명이론, 개인 자유권의 제한, 우상화된 김일성주의와 같은 사상들은 기독교 신앙과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 그런데 문제는 공산주의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에도 이와 다른 형태의 비기독교적인 사상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허위의식을 폭로하는 것이 신앙의 중요 과제 가운데 하나라면 한국교회는 단지 공산주의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성과 비기독교적 요소들을 밝혀낼 수 있어야 한다. 실상 자본주의에 나타나는 물신숭배나 맘모니즘은 공산주의만큼이나 무신론적이며 물질주의적이다. 적자생존의 경제원리 역시 기독교 사상과 조화를 이룬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교회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무비판적이고 심지어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을 교회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런 현상 가운데 하나가 1970년대 이후 줄곧 한국교회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교회성장주의라 하겠다.
한편, 한국에서의 기독교와 공산주의 사이의 갈등은 내재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외재적인 이유도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일제시대까지 서로 민족의 자존과 독립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통해 협력의 관계에 있었으나 이후 미국과 소련을 두 축으로 하는 냉전질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갈등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소련은 북한에 강력한 사회주의 전선을 구축하려 했고, 미국은 남한에 마찬가지로 강력한 반공주의 국가를 건설하려고 시도했다. 이런 국제사회의 정황 속에서 남한과 북한의 정치지도자들은 세계의 냉전질서를 주체적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민족이라는 개념 속에서 서로 만나지 못한 결과 분단국가가 되고 말았다는 냉정한 자기비판이 필요하다.
2) 기독교 복음의 의미
기독교의 복음은 사랑과 용서, 그리고 섬김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교회는 지나간 역사 속에서 사회주의와 갈등했고 한국전쟁을 전후해서는 현실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억압과 착취를 받았음이 사실이다. 물론 공산주의자들은 그러한 억압적 행위가 과거 한국교회가 보여 준 친미 제국주의적 행위에 대한 사필귀정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또 다른 연구가 필요한 일이지만, 한국교회가 현실 공산주의 아래에서 억압과 핍박을 받았음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월남 기독교인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사랑과 용서의 종교임은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마 5:44) 과거 자신들이 받은 상처를 잊지 못하고 용서와 화해를 거부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이다. 한국전쟁 말기에 기독교가 앞장서서 휴전을 반대하고 멸공통일에 앞장섰던 경험은 기독교가 추구하는 평화와 사랑의 정신과 조화를 이루기가 어렵다.
한편, 기독교의 가르침은 섬김과 봉사의 행동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전하시면서 동시에 가난한 자, 소외된 자의 친구가 되셨고, 환자들을 치유하시며 귀신들을 내어 쫒았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이 봉사와 섬김을 위한 삶이라고 말씀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막 10:45) 독일의 통일에 일정한 역할을 했던 독일교회에 대한 연구들은 한결같이 서독의 교회가 동독교회와 동독사회를 섬기는 자세를 가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섬김의 태도가 아니라면 아무리 정치적 통일을 이루어도 사회적 통합에 이르지 못한다는 점도 보여주고 있다. 한국교회에서 1993년부터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된 ‘남북나눔운동’은 비록 이데올로기적 경직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섬김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독교 복음은 그리스도인과 교회로 하여금 평화의 사도가 될 것을 요구한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과 분열을 화해시키고 치유하기 위함이었다. 그분은 십자가로 서로 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서로 원수된 관계를 화해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과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주셨다.(고후 5:18-19)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복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셨다.(마 5:9)
우리사회는 지금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갈등과 분열의 고통 속에 있다. 냉전적 사고는 흑백논리에 기초한 선악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서 모든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 된다. 한국사회는 물론 한국교회 역시 이 같은 냉전적 사고로 인해 갈등과 분열의 아픔 속에 있다. 한국교회의 반공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태도야말로 분열된 남북한과 한국사회, 그리고 한국교회의 화해와 통합에 기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이 곧 화평케 하는 자로서 한국교회가 부름 받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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