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과의 친밀감 ------------------------------

여러분을 축복하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또한 존경하며 경외함으로 봅니다. 며칠 전 기숙사의 한 부족 형제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한국을 부러워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곳의 사람들이 부럽다고 했으며 마음속에 본받고 싶은 마음이 제 안에 많이 들었습니다. 왜냐면 겉의 상황으로는 한국이 더 좋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겉모습으로 판단하시지 않으며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헌신된 여러분과 같은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곳에 있는 동안 많은 현지인 분들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여러분들은 저의 영적 선생님이시며 저는 여러분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여러분을 사랑하시는지. 여러분을 닮길 원합니다. 여러분 안의 하나님을 닮기 원합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말씀은 호세아서 6:1-3 입니다.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저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알고 싶었었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내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역사하시고 친밀할 수 있을까 생각해 왔습니다. 비록 태어나면서부터 믿음의 가정 속에 있었지만 제 삶에서는 하나님을 깊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지금 제 나이가 몇 살 인 것 같습니까?

제 생의 20년 이상은 답답함의 시간이었지만 돌아보면 또한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도, 예배, 전도,등 많은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물론 좋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감입니다.

그렇다면 친밀감은 무엇입니까? 친밀하다는 것은 바로 가까운 친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친구는 서로의 문제점들도 나누며 깊은 속사정까지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갖는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지금부터 제가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가진 몇 가지 요소들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친밀감을 갖기 위한 첫번째 조건은 바로 갈급함입니다.

몇 년 전 제 마음에 깊은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하나님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목욕을 하면서도 그랬고. 걸어다니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갈망 때문에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제 마음의 소원은 하나님을 더 아는 것이고 그것에 갈급해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었듯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자가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였습니다. 내 안에 그 전심의 갈망이 있었으며 그 마음의 간절함이 마음의 상함과 애통함으로 연결되어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가지려면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 갈급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많은 부분에 마음이 상한 자의 복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는 마음이 겸손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시10:17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시편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시 63: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또 다른 시편 기자는 하나님과의 갈급함이 얼마나 많은지 헐떡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119:131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간절함을 가진 사람이 바로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두번째 항목은 기다림입니다.

호세아서의 말씀처럼, 시편의 말씀처럼 기다림은 정말 필요합니다.

성령하나님이 내주하셔야 체험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으며 능력있는 사람으로 살 수 있는데 이 성령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기다림이 큰 역할을 합니다. 갈급함과 더불어 기다림이 하나님을 만나는데 필요한거죠.

저의 기다림에 대한 경험을 적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이 메세지를 혹시 전해보지 않겠느냐고 3일전에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혼자 하나님께 물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 제가 말하길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루가 지나 이틀째 물어 보았습니다. 역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다음 삼일째 되는 날 아침 마지막 시간에 예배중에 하나님이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내게 너의 입을 달라고... 전 말할 수 없는 자라고 하나님께 이야기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아론의 입을 네게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전 그 말씀에 순종하길 원했고 바로 이 메세지를 준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기다림이란 필요합니다.

제가 성령 세례를 받게 된 것도 바로 기다림이었습니다. 저는 이 표현을 즐겨 사용합니다. 다른분의 고백이기도 하고 저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 다른분의 고백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하루가 지나도 별로 변함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기대하며 기다렸습니다. 하루 하루가 지나갔으며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에 바로 하나님의 시간에 제 안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따뜻함이 있었고 평안과 기쁨 속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저를 만나주신거죠...


세번째는 성령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성령 하나님은 놀라우신 분입니다. 친밀함을 가져다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기도 중에 성령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너는 아직도 전적으로 나를 의지하지 못하는 구나. 왜냐면 전 저의 생각으로 이런 기도제목으로 기도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저로 하여금 이런 고백을 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 전 기도제목도 모르는 자입니다. 하나님보다 기도하는 행위자체가 더 우선이 되었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제게 근본부터 하나님 의지하도록 인도하여 주세요.

이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깊은 곳까지 말씀하십니다. 친구란 바로 속사정까지 서로 알려주고 말하는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알때 우리는 깊은 영적 원리를 알게 됩니다.

영적 원리를 알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영적 원리는 하나님의 깊은 곳입니다. 영적으로 민감해지고 영적인 일을 알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과 친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나님과 친밀하면서 하나님과 대화하기를 즐겨하기 시작했습니다.

걸어다니면서도 하나님 오늘 날씨가 참 좋죠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 몇 년 안 되었지만 얼마나 놀라운 은혜가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친밀감입니다. 친밀하면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깊은 교제가 있으며 영적으로 많은 비밀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하나님은 언젠가 마태복음 16:19절을 통하여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마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 말씀은 여러분이 이 땅 가운데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영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친밀함이 민감하게 합니다. 저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것이나 저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하여 한 번 더 생각하고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하나님 내게 이 일이나 상황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길 원하십니까? 라고 말입니다.

제가 발톱에 무좀이 있어서 이것이 참 부끄러움이 되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치료받아야 하는데 가기가 두렵고 치부를 드러내기가 싫었던 거죠.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마음속을 솔직히 드러내지 않는구나. 이것이 부끄럽고 그래도 내어 놓아야지 치료가 되지 않느냐? 내어 놓지 않음은 친밀함을 저해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친밀함을 가지십시요. 친밀함을 갖기 위해서는 성령 하나님이 꼭 필요합니다. 또한 성령 하나님을 제한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이 어떤 음성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고 생각하기 쉽고 우리의 생각으로 어떤 법칙을 정해 놓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뛰어나고 높으신 분입니다. 모든 상황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거죠. 다른 사람을 통해서, 책을 통해서, 걸어가다가 생각으로, 느낌으로, 자연을 통해서, 환상으로, 꿈을 통해서 등등...


전 하나님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라고 기도하고 나오는 어떤 것도 어떤 상황에서도 성경에 기초해하나님의 성품에 맞는 것이면 하나님의 음성으로 취합니다. 친밀할 수록 많은 놀라운 체험들이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성경에 이른 비와 늦은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명기 11장 14절로 15절 같이 읽겠습니다.

[11:14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11:15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여기에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가 농사를 짓지 않아 모르겠지만 식물이 물이 많이 필요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씨에서 싹이 틀 때, 과실이 맺힐 때 입니다. 씨에서 싹이 틀 때 필요한 비는 이른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실이 맺힐 때 필요한 비는 늦은 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성경에는 비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이른비와 늦은비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른 비요? 늦은 비요? 아닙니다. 둘 다 중요한 것입니다.

다른 말씀도 있습니다. 먼저된 자와 나중된 자와 품삯에 관련된 말씀도 있습니다.

[마 20:1-16]

[20: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20: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 보내고

20:3 또 제 삼 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20:4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20:5 제 육 시와 제 구 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20:6 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20:7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20: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20:9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20: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20:11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20: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20: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20: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20: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품삯에 관련된 비유를 볼 때 아침 일찍 부터 나온 자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른비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오후 늦게 나와서 일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늦은 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똑같이 대하십니다. 저는 이 비유에 대해, 또한 이른비와 늦은비에 대해 이것을 공평하다고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많이 생각해 왔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일찍 온 사람이 하루 종일 일해도 얼마나 일하겠는가. 오히려 지치고 힘들어서 일을 대충 하게 될 수도 있다. 나중에 온 사람은 미안해서라도 얼마나 열심히 일하겠는가?에 대한 생각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두 인물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바로 베드로와 바울입니다.

[갈2:7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2: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베드로는 일찍부터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을 누구보다 먼저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른비에 해당 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인생에 있어서 나중에 예수를 알게 됩니다. 바로 늦은 비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중요합니까? 바울이 중요합니까?

둘다 중요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의 공평함인 것입니다.

저는 어떤 한 지체를 압니다. 그 지체는 믿은지 얼마 안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들이 얼마나 놀라운지 성령안에서는 먼저되고 나중되고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한국인이든지, 벵갈인이든지, 부족 사람이든지 다 똑같은 주의 자녀이며 동등한 동역자인 것입니다.[행 10:24-35] 전 그 지체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우리가 사람을 보면 판단하지만 그 지체뒤의 하나님을 보면 배우게 됩니다.

바울을 보십시요. 나중된 자, 늦은 비의 사람으로 그가 과연 늦게 되어서 적은 주의 일을 감당했습니까? 바울보다 더 적은 일을 하였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가 복음을 위해서 뿌린 것들이 얼마나 큽니까?

우리 한국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파송되고 한국이 발전되었긴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바로 서양에서의 많은 선교사들, 이른비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 이 한국이 복음이 들어왔고, 늦은비와 같은 한국 사람들이 오늘 날 세계에서 큰 복음의 일을 열정적으로 감당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사람의 시간으로 보면 뒤져 있는 것 같이 보이고 나중 된 것 처럼 보이지만, 여러분들을 통해 늦은비를 통해 하나님은 이 나라를 부흥케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바울과 같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친밀함을 갖는 것도 성령을 받는 것도 자원함이 없으면 되지 않습니다.

저는 두 인물을 다시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 두 인물은 바울과 가룟 유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사람에게 먼저 손 내미셨습니다. 바울을 통해선 기적적인 것을 통해, 가룟 유다도 또한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여러 것들을 보게 되었죠. 하지만,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자원하였습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르며 보았지만 결국 그 마음을 열지 않아 쓰임받지 못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손 내미십니다. 어떤 분은 주변 사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손 내미실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이 손 내미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 손을 잡지 않으면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족 마을의 존귀한 바울과 같은 분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은 사도행전을 쓰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들였고 자원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가지는 몇 가지 요소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갈급함으로 기다리고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때에 자원했을때 하나님과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기름부으심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넘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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