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0:11-14절

10: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10: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영지주의는 고린도교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영지주의 요소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가 고린도 교회 당시의 가장 강력한 이단적인 요소였듯이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영지주의적 요소가 가장 강력한 이단적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는 결국 육과 영을 분리하여 영적인 것에만 모든 관심을 두던 사상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육에 관련된 것들은 경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눈에 보이는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바울은 우리의 삶도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육과 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요소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그것은 단지 형상일 뿐이지, 영적으로 의미가 없다고 하면서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영과 육을 분리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육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왜 하나님은 육이라는 것을 정성들여 만드셨겠습니까? 그리고, 왜 육이 존재하는 역사라는 공간가운데 두셨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육을 왜 입으셨겠습니까? 또한 왜,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육을 입으셨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도 또한 부활 할 때 육을 입을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까? 고린도전서에는 육은 영을 담는 그릇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도 영적인 것만 소중하게 여겨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몸과 관련된 것들, 역사 같은 것에 관심이 없거나 소홀하지는 않습니까? 이런 태도는 영지주의적 태도와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두 가지의 선택이 우리 가운데 던져져 있습니다. 하나는 올바른 믿음의 본을 보이는 것이고, 하나는 믿음에 실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게 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데까지 자라길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도 버려지길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죄에도 불구하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4:5-7절에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나와 있습니다. 모세가 따르는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다라고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34: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34: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 첫 번째의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밝히신 하나님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에 대해서 자비롭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고 은혜롭지 아니하고 화를 잘 내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만든 하나님입니다. 두 번째는 벌을 면제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즉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보이신 것을 요약하면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는 이유는 어떤 사람도 멸망하길 원하시지 않고 생명의 길로 오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6장 9-11절을 읽으면서 기억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 안에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는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죄인들이 정죄당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다시금 새롭게 되는 공동체가 하나님의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을 계속해서 부인하고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멸망당하는 일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니느웨 사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얼마나 잔인한 사람들이었습니까? 니느웨는 바벨론의 수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무자비하게 이스라엘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임신한 여자들의 배를 가르고 사람들의 목을 베어 창 끝에 꿰어 놓는 등 그 잔학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고 은혜로우신 것을 알고 그곳에 가라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당연한 마음이었겠지요. 니느웨는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회개는 일시적인 회개였습니다. 결국 나훔서에서 보듯이 니느웨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당하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께 돌아올 길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부인하고 그 분께 마음을 드리지 않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불현듯 임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30에는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이제는 직접적인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심판은 과거 이스라엘에게 행했던 것 같이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주님의 재림의 날이 될 것이며, 하나님은 그 때까지, 또는 우리가 언제 이 세상을 떠날지는 모르지만 세상을 떠나는 그 때까지 우리를 오래 참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 오래 참으시고 인자하시고 자비가 많으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의 역사가 반면교사가 되었습니다. 반면교사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다른 사람이나 사물(事物)의 부정적(否定的)인 측면(側面)에서 가르침을 얻음을 이르는 말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끝끝내 돌아오지 않을 경우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반면교사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초청에 귀를 기울이시겠습니까? 아니면 끝끝내 여러분들이 원하는 대로의 삶을 살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반면교사로 남겠습니까?


제가 다니는 신대원에 참 훌륭한 교수님이자 목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저희 학교는 일주일에 네 번 예배를 드립니다. 그 예배 때, 여러 교회의 목사님들이 오셔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렇지만 모든 말씀이 다 성경에 바탕을 둔 말씀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자기 자랑을 늘어 놓으시는 분도 있으시고, 어떻게 교회 성도들의 숫자를 늘리셨는지를 말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성경적인 이야기를 하시지 않는 일부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어려워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교수님은 이런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배울 것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한 가지는 좋은 장점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들을 배우려고 하고, 만약 설교에 성경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겠다라고 반면교사로 삼으면 된다는 취지의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무장하며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성숙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무언가 안 좋은 것을 보았을 때 그것으로 인해 상처받고 교회는 이런 곳이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면 안되겠다라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참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그 분들입니다. 우리야 그들을 반면교사로 삼으면 되지만, 그들은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이제는 우리가 힘써 배워야 할 것 즉, 그리스도인으로 무엇을 본을 보이면서 살아야 되는지 말해 보겠습니다. 본문에서는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우상 숭배를 하지 않는 삶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상 숭배라고 하여서 어떤 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 절하지 않는 것만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중에 많은 분들은 우상 숭배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상 숭배는 그런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우상 숭배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섬기고 있는 하나님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해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게 됩니다. 그것은 다른 신이 아니었고 그들이 하나님이라는 신을 금송아지 형태로 만들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이런 우상 숭배를 혹시나 하지 않고 있습니까?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이미지를 내가 만든 이미지에 국한시키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리를 위한 도구로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우상 숭배는 우리가 평생 싸워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말 그대로 우상을 만들어 놓고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설교 시간에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상 숭배의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우상을 섬기고 있을 때 그 영향력들이 우리 삶 가운데 나타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우리가 더욱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우상들입니다.

이 우상에게서 피하라라고 14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피하라라는 원어적 의미는 도망치라에 가깝습니다. 그만큼 우상 숭배의 영향력이 심각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개척한 이재철 목사님의 이야기를 얼마 전 서점에서 읽었습니다. 그 책에서 저는 두 가지에 참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교회를 개척하면서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하며 교회 가운데 만난 모든 사람들과의 교제가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는 겸손한 자세였습니다. 자신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입었다고, 심지어 어려운 상황에서나 자신을 어렵게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그들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큰 복이었음을 고백하는 태도였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을 교회에서 말씀을 준비하면서 오히려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었던 큰 특권이 있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안에 이런 이야기를 듣고 참 부끄러움이 많았습니다. 동막교회 청년부를 맡으면서 제 안에 많은 기쁨이 있었지만, 때로는 무언가 제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는 듯하여 답답해 하며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축복의 통로임을 잊어버릴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눈물이 다 날 정도로 하나님 앞에 부끄러웠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우리는 너무나 우리 앞에 상황을 보면서 그것들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두 번째 감동 받은 것은 교회 이름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교회 이름은 주님의 교회입니다.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이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었다가 교회 공동체의 어떤 사람의 영향력이 커져서 주님의 교회가 되지 아니하고 사람의 교회가 되는 듯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자신이 교회를 개척하면서 임기를 딱 10년으로 못 박고 10년이 지나면 교회를 떠나기로 하면서 사역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읽은 책도 10년이 지났을 때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지난 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눈 것이었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한국 교회의 참 본이 되는 목사님 중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 우상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게 될 까봐 이 모든 것들을 계획하며 실천하며 산 분이었습니다. 저도 그런 뜻을 생각해 보며 저 또한 이재철 목사님을 하나의 우상으로 만들지 아니하기 위해 과감하게 그 책을 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여러 책들도 있지만 그 분의 책을 더 읽으려는 욕심을 내려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순간 이재철 목사님을 우상으로 만들려는 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어떤 우상을 우리는 섬기고 있습니까? 어떤 목사님의 설교만 들어야 은혜가 되고 다른 분의 설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그 목사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 예배에만 참석해야 한다면 여러분은 또한 그 교회를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삶의 어느 자리에서나 여러분은 여러분 마음의 동기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어떤 큰 모임에 스타이신 한 선교사님이 있습니다. 돌아가면서 설교자들이 와서 말씀을 전하는 이 모임은 이 분이 설교하실 때마다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그리고 인지도가 별로 없는 분이 말씀을 전하실 때는 자리가 많이 빕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우상 숭배의 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이지, 어떤 상황을 즐기는 자는 아닌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요한복음 1장 20절에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라고 말하면서 12절에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 자신이 돋보이려고 하고, 우리 자신의 생각대로 우리의 삶이 움직여지고 공동체가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우상 숭배에서 돌이켜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구원하시기 위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오해하기 시작합니다. 많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을 다른 이미지로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상황인 로마 압제에서 벗어나게 할 분으로만 인식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내가 바로 너희들이 원하는 이런 왕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리를 피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미지에 부합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도 바로 우상을 섬기는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은 4장 8-9절에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나에게 절을 하면 이 모든 권세를 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들 단호히 배척하면서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40일 광야에서의 우상 숭배와 관련된 이런 사단의 시험은 40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평생의 삶을 통해서 사단은 계속 이렇게 속삭입니다. 죄인을 대속하는 역할이 아니라 정치적인 왕이 되라고, 너의 능력을 보여서 사람들을 굴복시키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27장 40절에 예수님보고 사람들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단의 말과 비슷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가운데 사실 때 평생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셨고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거스린 다른 이미지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는 과정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니 이제 우상 섬기는 문제에서부터 우리는 자유이고 절대 우상을 섬기지 않을 것이다라는 마음이 혹시 있으십니까? 예수님처럼 우리는 평생의 삶 가운데 똑같은 말을 사단으로부터 듣게 되고 마음 속에 우리가 주인으로 섬기는 예수님 외에 다른 것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우상에서 벗어나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 섬겨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말씀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배우고 우리의 편견을 내려 놓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자기가 원하는 말씀만 듣는 것도 금송아지를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한 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헌금을 강조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헌금을 못할 때 우리의 마음은 왠지 죄책감을 느끼고 자유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너희가 정작 헌금을 하면서 진짜 중요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헌금을 하면 죄책감이 없고 헌금을 못하면 죄책감이 있으면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할 때 우리의 마음 상태는 어떻습니까? 오히려 더 죄송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것들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상의 한 형태인 것입니다.

저는 이 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강력한 우상은 바로 물질의 우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는 물질적인 것이 해결되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는 모습이 지배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사회의 문제점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함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예레미야 2:19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어나게 된 문제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땅을 산다면 어찌 불의가 판치며 물질적인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예수 믿는다고 하여 그 사람을 예수님보다 더 신뢰하는 이상 우리는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사람만의 주가 아니라 모든 만물과 모든 사람의 주이십니다. 따라서, 그 분이 이 나라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도록 기도해야 하지, 어떤 사람이 주가 되도록 기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기독교 역사에서 수치스러운 역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신사참배를 결의한 것이었습니다. 신사에 가서 참배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니라 단지 일본을 향한 애국심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장로교 총회에서 결의(1938년 9월10일 장로교 역시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제27회 총회를 열어 신사참배를 결의하기에 이른다.) 하였고 많은 목사님들이 신사참배에 참여하였습니다. 분명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누가 봐도 우상숭배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것은 우상숭배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신사참배를 거절하다가 죽임을 당한 주기철 목사님의 사례를 아실 것입니다. 신사참배한 목사님들을 맹비난한 목사님들이 장로교의 한 분파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참 재밌는 것은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하셨을 때 자식들이 갈 곳이 없어서 그 분파의 목사님들을 찾아가서, 자기들을 거두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매몰차게 거절당해서 주기철 목사님의 자녀들은 이리저리 방황했다고 합니다. 장로교 통합측의 한경직 목사님은 신사참배에 참여한 것을 일생동안 참회하면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이라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모든 것 되신다고 고백하며 죄인의 심정으로 사셨습니다.("저는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앞에서 죄인이며 신사참배도 한 사람입니다" 1992년 당시 영락교회 원로 목사이던 고(故) 한경직 목사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 수상 축하자리에서 이처럼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주기철 목사님의 자녀들을 매몰차게 쫓아냈던 그 분들은 우상숭배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지만 또 다른 우상숭배인 자기 의를 우상으로 섬기고 사는 것과 다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분명한 잘못은 있지만 자기 의를 예수보다 더 내세우고 이웃 사랑보다 더 내세운다면 그것자체도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국을 신으로 섬깁니다. 미국이 우리 나라의 보호자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똑같은 일이 이스라엘에도 있었습니다. 애굽이라는 나라가 자신들을 바벨론으로부터 지켜줄 보호자라고 애굽으로 가자 애굽을 중시하자라고 말하고 있을 때 선지자들은 애굽이 너희의 보호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보호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우리 나라를 도와 준 것은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그 모든 역사 가운데 이루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미국이 우리 나라의 보호자가 아니고 하나님이 보호자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 인생의 보호자요 반석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뜻이 아니라 나의 구원 나의 반석 오로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에게서 요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평생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우상 숭배에서 넘어지지 않을까 조심하며 우상 숭배에서 피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상 숭배의 덫에 빠져들어 넘어질지도 모릅니다. 우상 숭배는 모든 죄의 시작입니다. 과거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라는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을 배역하고 다른 것을 따르기로 결정하면서 죄가 들어왔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다음과 같은 영혼의 고백이 늘 넘쳤으면 좋겠습니다.

시편 62편의 한 부분입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아멘.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시며 우리의 근원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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