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0장 15절
나는 지혜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어느 집회에 한 모임에 아멘녀가 있었습니다. 신일 형제가 절 보고 된장남이라고 부르듯이 성별에 따라 차별하는 말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아멘녀는 집회에서 목사님이 설교 할 때마다 아멘 아멘을 말합니다. 뭐 다 같이 아멘이라는 말로 화답할 때는 괜찮지만 목사님이 뭐 한 마디 꺼내면 다 아멘합니다. 정말 귀에 거슬려서 예배에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속으로 누가 입에 지퍼를 닫을 수는 없을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심지어, 틀린 이야기를 해도 아멘, 농담을 해도 아멘.
국어사전에는 아멘이라는 뜻을 기도나 찬송 또는 설교 끝에 그 내용에 동의하거나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듣고 자기 머릿속에 동의가 된다고 생각했을 때 그 말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을 때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교인들의 문제점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생각 없이 아멘을 남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 없이 아멘 아멘을 남발하니까 삶에서 변화가 없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오해 중의 하나는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믿으라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러려면 무엇 때문에 이성을 주셨습니까?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공중의 나는 새를, 들의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셨습니까? 오해 중의 하나는 예수님은 논리적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굉장히 논리적이셨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마가복음 3:22-27절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예수님보고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것이다라고 비난합니다. 예수님은 거기에 어떻게 답변하셨습니까?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나라가 분쟁하면 나라는 망하게 되어 있다라는 논리로 공격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냉철한 지성과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율법사 하나가 예수님에게 다가와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이냐고 물어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두 가지로 요약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변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깊이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형식에 얽매여 있는 모습을 보면서 진정한 하나님의 뜻은 마음과 같이 가는 것이라고 말하셨습니다. 얼마나 생각이 많으신 분이셨겠습니까? 우리 안에도 이런 태도가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묻고 또 물어도 귀한 질문입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는 이성적이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정말 이성적인데 비해 기독교는 이성적이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같이 이성을 조금이라도 사용하는 걸 싫어했던 세대가 또 있었을까요? 다들 경험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대학을 봐도 그렇습니다. 철학과 물리학이라는 과목이 인기가 있습니까? 신대원에서도 조직신학이라는 변증학이 별로 인기가 없고 다들 실천을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것에 관심이 있으며 경험하는 것에 초점이 많습니다.
SBS 신의 길, 인간의 길이라는 다큐에서 유럽의 많은 교회들이 술집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을 비추면서 한 사람과 인터뷰 했습니다. 왜 교회를 안다니냐? 그런데 그 청년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이성적이지 않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뭔가 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기쁨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유럽 청년들이 불교나 샤머니즘에 관심이 많은데, 그 이유는 자기가 무엇을 이룰 수 있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 반박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주장을 하려면 자기가 정말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의 기쁨을 누려 본 다음에 자기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 때의 기쁨과 비교해야 합니다. 전자를 경험해 보지도 못하면서 후자를 이야기하는 것은 모순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기쁨을 추구하다가 하나님을 아는 기쁨이 충만하여져서 세상의 기쁨이 아무것도 아니었노라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널리고 널렸습니다. 왜 그런 것들은 살펴보지 않습니까? 다 생각 없이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쪽만 생각해 보고 다른 쪽은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이성은 결단과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삶에서 변화를 일으킨 것들이 있다면 어떤 과정을 통해 변화가 이루어졌습니까? 어떤 것에 도전 받아서 나의 삶을 생각해 보니 그것을 적용하지 않고서는 나의 삶이 바뀔 수 없겠구나라는 철저한 인식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삶의 변화가 없는 사람은 이성을 쓰지 않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받고도 단지 감정적으로만 반응하고 정말 그것이 나한테 필요함을 뼈저리게 인식하여 이렇게 해야 겠다라는 결심으로 나가는 이성을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의지를 일으키는 것은 이성의 명령에 의해서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읽을 때 왜 그런 말씀이 있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설교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아멘 하지 마시고, 그 말씀이 정말 하나님의 뜻이 담긴 말씀인지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교회에서 상처 받았다고 하는 분들 중 많은 분들이 이성을 사용하지 않아서 넘어졌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들어서 그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면 받아들이면 됩니다. 이걸 못하니 상처받습니다. 무너집니다. 쓴 뿌리가 생깁니다.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 한 말이더라도 분별할 수 있길 바랍니다. 이것을 분별하기 위해선 여러분은 말씀을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참 신기한 현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선교 단체에서 훈련 받을 때는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리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겠는데, 훈련이 끝난 다음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음성이 잘 안 들린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왜 옛날 초대 교회 시절에는 병자들이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역사가 많이 일어났는데, 오늘날에는 조금밖에 안 일어나느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하나님의 음성이 안 들린다고 뜻을 모르겠다고 방황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럼 다음과 같은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면서 광야에서 오랫동안 생활 했습니다. 먹을 물도 없고 양식도 없었습니다. 급하게 나오느라 무슨 양식을 많이 준비해 나왔겠습니까?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출애굽 했습니다. 그럼 먹을 것과 물은 어디서 구합니까? 아무것도 없는 광야 생활을 했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먹을 것도 마실 것도 구할 수 없습니다. 유일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또는 전쟁을 해서 전리품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공급하는 방법을 주된 방법으로 채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공급자 되심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5:12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5:12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만나가 그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 해에 땅에서 나는 소출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병 고침의 기적들이 가장 많이 나타나는 곳은 어딘지 아십니까? 병원이 없는 곳입니다. 치료 수단이 없는 곳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재정적인 공급이 가장 잘 채워지는 곳은 어딘지 아십니까? 경제적인 것을 도무지 채움 받을 수 없는 곳입니다. 방글라데시에 갔더니 제자훈련 학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은 무슬림 국가라서 도무지 크리스쳔들에게 경제적 뒷받침을 해 줄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놀랍도록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가장 하나님의 음성이 명확하게 들려지는 곳은 어디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쉽게 접할 수 없고 위험한 지역에서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말씀하실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현실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병에 걸렸을 때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이 많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음성이 안 들린다고 말하십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기록해 놓은 책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생각하고 실천하면 왜 내 삶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고 변화되지 않겠습니까?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하나님이 사용해서 먹으라라고 말하는데 아직도 만나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이 땅의 소출물에는 관심이 없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 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 알 수 없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생각하여 보라, 말씀을 통해 이 분이 진정한 구원자가 아닌가 생각하여 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이 예언한 분이 바로 이 분이다라고 여러 증거를 대며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메시야는 아직 안 오셨어라고 말하며 다른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이와 비슷한 현상이 우리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는 그 말씀을 제외시켜 놓고 어떤 다른 말씀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바울도 이 세상에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그 말씀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상고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7: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날마다 성경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로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헬라인들의 관심은 지적인 곳에 있었습니다. 남자도 그 당시에는 지적 교육을 받은 대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해마십시오. 믿음은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오히려 이성을 사용하면 사용할 수록 우리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성 사용의 최종 이유는 인간의 한계를 깨닫는데 있습니다. 즉, 인간으로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잘난체를 하는 것이지, 진짜 이성적으로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파스칼도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가장 종착점은 이성의 한계를 느끼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정말 신이 존재하고 신이 가르쳐준 종교라면 다음과 같은 것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신이 완전해야 하며 신의 길, 신이 제시해 주는 길 또한 완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신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신이 아니겠지요? 인간이 범하는 범죄적인 것들을 신이 행한다면 신이겠습니까? 그리고 신의 가르침을 따르는데 그것이 완전하고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한 신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신명기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단 사이비 종교가 보면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악한 행동을 하도록 권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그런 종교들은 한계가 있는 인간이 만든 종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인간이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교리가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있다면 무슨 신이겠습니까? 인간이 만들어냈다는 것을 반증하지 않겠습니까?
세계사를 읽어보면 문명의 시작에 대해서 나옵니다. 큰 강 근처에 인류는 문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량을 조절하지 못해 농사가 잘 될 때도 있지만 망할 때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느끼게 되고 그 유량을 조절해 줄 절대자 즉, 신들을 만들게 됩니다. 물의 신, 바람의 신, 농사의 신 등등을 말입니다. 윤회 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한국 기독교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김용옥 교수의 책입니다.)이라는 책을 보면 윤회 사상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곡식들이 자라고 없어지고 또 시간이 지나면 곡식들이 자라는 것을 보며 자연은 순환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윤회 사상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이 나옵니다. 이해 되지요? 내가 이해하는데 인간의 범주 안에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심지어 세계의 유명한 신학 대학원 교수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삼위일체도 아직까지 이해되지 않는 교리이며,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라는 것도 정확히 설명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최소한 모든 인간의 이해 범위를 뛰어넘는 것이 있어야 진짜 신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21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인간의 한계를 이야기하시고 있습니다.
지혜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스스로 판단하여 보십시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예수를 믿어도 난 왜 예수를 믿는가? 예수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 속에 그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견고한 반석 가운데 서게 됩니다. 또한 여러분의 삶 가운데 결정해야 할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고 결론을 내리시며 그대로 살아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을 줄 것입니다.
시편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지금 저는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말씀을 가지고 명확하게 주의 뜻을 이해한다면 저는 과감히 그것을 행할 것입니다.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가 저에게 괴로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 한 구절을 가지고도 일주일 동안 싸워보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깊게 새겨 보십시오. 삶을 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자매가 저에게 전화를 해서 성경은 이 시대의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 답을 내리고 있지 않다라고 말한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과감히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원리를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혜있는 자들아,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생각하여 보라고 하고 있습니다. 지혜있다 하면서 쓸 데 없이 다른 일을 생각하느라 정작 하나님 뜻을 생각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다른 일에는 잘 생각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생각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에베소서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15절을 읽고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기도하며 생각하길 원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한계를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배우고 그것을 통해 주의 뜻을 발견하며 실천하길 원하오니, 우리 가운데 주의 지혜로 채우시고, 주의 말씀을 가지고 고민하게 해 주시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특히,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지를 성경을 통해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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