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신명기 34장
34:1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34:2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34:3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34: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34: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34:6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34:7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34:8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34: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34: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34:11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화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34:12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


1. 날이 추워집니다. 추워지면 사람이 감정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외로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찬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무언가 우리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발라드가 유행하고, 슬픈 영화를 보면서 울먹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슬픈 이야기를 좀 해 보려고 합니다. 구약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나라를 읽고 고통 당할 때의 이야기도 슬프지만 오늘 모세의 마지막을 보내는 장면도 가장 슬픈 이야기 중의 하나입니다.

2. 모세의 일생
 모세의 일생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모세는 태어난지 석달만에 죽음을 피해서 갈대 상자에 담겨 나일강에 몸을 맡깁니다. 바로의 딸이 갈대상자를 보고 아기를 불쌍히 여겨 양자가 됩니다. 그렇게 바로의 궁에서 자라다가 자기 민족의 고통을 봅니다. 그 고통을 보고 분에 못 이겨 자기 민족을 괴롭히던 애굽 사람을 죽이고 도망하여 미디안 땅으로 갑니다. 거기서 결혼하고 처가살이를 오랫동안 하게 됩니다.
 나이가 팔십이 거의 다 될 때까지 어찌보면 지루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은 일상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나이 팔십이 되면 좀 쉬고 싶은 나이일 수도 있는데, 그 때부터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단 하루도 편할날이 없는 날들을 살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두려운 싸움을 싸우게 됩니다. 애굽의 노예 생활에 길들여져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불신하고 모세에 대해서 툭 하면 불만을 털어 놓고 심지어는 돌로 쳐 죽이려고 까지 합니다. 모세는 광야 생활에서 수많은 적군들 사이에서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야 합니다. 모세의 손에 어찌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운명이 달려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알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권면해야 했습니다. 모세가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삶을 살았겠습니까? 인생에서 자기 문제로 고민하며 사는 것도 쉽지 않은데, 다른 사람들, 자기 민족들 문제로 인해서 하루 하루가 가시 방석에 앉은 것과 같은 삶을 사는 것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 말씀을 잘 들었던 사람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툭하면 하나님에 대한 불만을 늘어 놓아서 모세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중보했습니까? 심지어 하나님에 대적하는 이스라엘 무리들을 위해 중보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 사람들을 살려 주십시요라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목표였던 오로지 한 가지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지루하고 길었던 싸움을 싸우게 됩니다.

3. 그런데 그 모세가 가나안 땅으로 못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인생의 목적을 가나안으로 향하고 일생을 그렇게 고생하고 살았는데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왜 못 들어 가게 되었습니까?
 
민수기 20장에 보면 그 이유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없어서 불평하는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는데, 모세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순간적으로 열받아서 내가 너희를 위해서 물을 내겠다라고 말하면서 반석을 지팡이로 칩니다.
20장 12절에 하나님은 모세를 보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하면서 가나안 땅으로 가지 못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모세가 뭘 그리 잘못한 게 있습니까? 모세는 하나님과 친구 사이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흥분해서 한 일은 어찌보면 모세의 전적인 잘못도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불순종하고 거역하려고 했기 때문에 모세가 잘못을 범하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였다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렸다고 모세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얼마나 청천벽력과 같은 선언입니까? 인생에서 그토록 바라고 목표로 고생하며 살았던 모세가 정작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면 그 느낌이 어떨까요?
정말 가슴 아플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제 가나안을 눈 앞에 두고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가나안 땅을 보여주며 모세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 전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의 뜻을 알고 평생 그분과 동행하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 놓고 하나님과 다시금 새로운 서약을 하게 합니다.
 이런 행동을 보게 되면 모세의 마음 속에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된 것을 이제는 받아들이고 이스라엘 백성들만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모세의 간절한 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느보산에 올라 자신은 비록 들어갈 수 없지만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죽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본문 34장 10절에서 12절에 보면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같은 사람은 없었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아시던 자다. 이 말이 어떻게 들립니까? 큰 여운으로 남고 하나님과 정말 그토록 가까웠던 자이구나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토록 모세와 가까우셨으며 친구처럼 지내셨으며, 아무도 하나님을 몰라 줄 때 하나님을 그토록 사랑했던 모세를 그냥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지 왜 생명을 거둬가실 수 밖에 없으셨을까요?
 모세는 가나안 땅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5절에 모세는 최후를 맞이하게 되고 msg에는 하나님이 직접 모세를 묻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했던 모세, 그 마음을 살폈던 모세를 하나님은 모세의 마지막 순간에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고 그를 직접 손으로 묻으셨습니다.
 하나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이 내용과 비슷하지는 않지만 심정을 느껴볼 수 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읍참마속이라는 사자성어와 관련된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읍참마속은 제갈량이 마속이라는 사람을 울면서 죽였다는 일화입니다. 마속이라는 사람을 제갈량은 자식처럼 사랑했고 마속은 제갈량을 아버지처럼 따랐습니다. 이 마속에게 제갈량은 중요한 곳을 잘 지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속이 경거망동해서 사려 깊게 행동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해서 그 곳을 지키지 못합니다. 이 마속은 제갈량에게 자기가 그 곳을 잘 지키지 못할 때는 목을 내 놓겠다고 말했습니다.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제갈량은 마속을 울면서 벨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면, 아무리 친해도 명령을 잘 준행해야 군대 기강이 살아 죽음의 격전지에서 잘 견디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율법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 중에 모세만큼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지 않고 산 사람이 혹시 있습니까? 그런데, 이 모세도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법 앞에서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나님이 정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리면 죽을 수 밖에 없고 영원히 멸망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모세도 빠져나갈 수 없는데, 우리는 얼마나 더 그렇겠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이 모세를 사랑하셨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바뀔 수 없습니다.
 모세는 율법의 상징입니다. 율법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저히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서는 율법 말고 다른 법을 세우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무슨 법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간음한 여인에 대한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간음한 여인이 잡혀 왔습니다.
율법에 의해서는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돌로 쳐서 죽임을 당할 일만 남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간음하고 대중 앞에서 사형 처분을 면제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 앞에 지금 선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 계시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이 간음한 여인을 그냥 보내셨습니다.
율법은 죄를 범하면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인을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은 변개치 않습니다. 그 여인은 죽어야 하는데, 그 여인을 보낸다면 그 처벌은 어떻게 해결 하는가입니다.  절대적으로 법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죽어야 할 사람을 그냥 보내라고 말하면 그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죄인을 보낸 사람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이 자신이 직접 그 죄를 담당하고 죽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5. 가장 친한 친구였던 모세도 하나님은 생명을 거둬가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장 자신을 잘 알고 그 뜻대로 했던 아들이신 예수도 십자가에 처벌받도록 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왜 그 희생을 감당했어야 하겠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심한 죄인이었습니까?
오히려 백성을 사랑했고 죄인들을 사랑했습니다.
그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구원받을 수 없음을 하나님이 심판하는 그 아픈 모습을 통해 보여주며 우리에게는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희생을 그냥 버리지 않습니까? 정말로 모세가 예수님이 그토록 원하셨던 하나님과 화해되며 생명의 길로 오라는 초청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지금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그토록 모세와 예수님이 그리고 초대교회의 숱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죽음에까지 이르면서도 걱정하며 예수를 믿으라고 그 길만이 살 길이라고 외치며 사라져 갔던 것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지난 수요 기도회 때 우리 가운데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정말 눈물날만큼 가슴 아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정말 사랑합니까? 자기의 일에 정신 팔려서, 남자 친구와 여자친구에 정신 팔려서 하나님은 계속 뒷전에 계시지는 않습니까?

6.  장신대를 은퇴하신 주선애 교수님이 계십니다. 나이가 85세입니다. 그 분이 여성신학생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신 것을 들었는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국 기독교 초기에 여성들은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많은 사회적 차별 속에서도 예수님을 향한 목마름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삶을 살았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 현실 속에 여성들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이 땅을 품고 기도했던 그 모습들이 사라져간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면서 안타까워 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곁에서 끝까지 사랑했던 사람들은 여성들이었습니다. 왜냐면 이스라엘 사회적 차별 속에서 예수님은 여성들을 자유롭게 해 주시고, 그들의 마음을 만지셨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이 다 주를 떠나도 여자들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들이 다 비겁하게 주를 버렸어도 교회는 여자들이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오히려 여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세상으로 떠나고 기도하지 않고 자신들의 일에만 관심을 가지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한국 사회에 그만큼 소망이 없음을 보여주고 하나님을 사랑했던 최후의 보루였던 여성들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친구처럼 사랑했던 모세를 율법으로는 도저히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없음을 아시고 죽이시고 손으로 친히 묻으셨던 하나님, 사랑했던 아들이었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기까지 그 아들까지 묻으셨던 하나님.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그 아픔에 반응해야겠습니까?
 그토록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일, 모세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고 그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기타 )
관련 성경구절들
출33:11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민12:6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민12: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민12: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히3:5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히3: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1. 히브리서에 보면 모세가 예수님을 바라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그냥 하나님께 맡기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2. 시므온도 늙은 상태에서 예수를 기다리고 아기 예수를 보면서 이제는 눈을 감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토록 보기 원하던 예수님.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열심히 예수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는 사람들이다.


AND

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1:1-10 중에서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1:2 우리가 너희 모두를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1: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1: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1: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1. 복음이 이기고 있는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당혹했던 것은 복음이 이기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것입니다. 나의 삶 속에 과연 복음이 이기고 있는 것인가? 말씀이 이기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이기고 있는가?

오늘날 많은 설교가 들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라면서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듣습니까? 그런데 그 많은 말씀들이 우리의 삶 가운데 얼마나 뿌리 내리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 순간은 말씀에 은혜받고 감격하다가도 또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삶은 똑같은 모습을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설교가 좋은 것 같다가도 설교자가 자신이 한 설교와 상관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는 것을 알게되면 그 설교가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럴 때 참 허무합니다. 그럼 그 사람이 여태까지 했던 그 설교는 무엇인가?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말씀을 붙들고 일생을 사는 사람인데, 그 사람에게조차 말씀이 영향력 없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물론, 여기서 저도 제외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의 삶 속에 복음이 이기고 있습니까? 복음이 능력이 있습니까? 우리 청년부는 어떻습니까? 과연 복음이 이기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혹시 어떤 교회가 예배가 좋다 숫자가 늘어난다 이런 말 말고 복음이 이기고 있는 교회이다.라는 소문을 혹시 들어본 일이 있습니까? 그 교회는 말씀이 성도들의 삶을 변화시켜서 성도들이 험난한 세상 가운데서 말씀으로 능히 이기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교회야!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2. 이상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고 하나님은 모든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신데,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이 이겼다는 소문을 잘 듣고 있지 못합니다. 한국 사회를 온통 둘러봐도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이기고 세상을 향해 담대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잘 듣지 못합니다. 그런 소식을 듣는 것이 오히려 어색한 시대가 되어 가고 있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나오는 데살로니가 전서는 오히려 복음이 이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6절에 보면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어 그 도시와 주변 도시 뿐 아니라 세상을 향해 믿음의 소문이 퍼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환난 가운데 저 교회는 참 신기한 교회야. 복음이 이기고 있어. 그런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교회를 발견하게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기독교에 대해서 공격하고 환난과 박해가 많아지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 그런 놀라운 일이 발생하고 사람들이 온통 그 교회에 대해서 참 신기하다.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교인들의 삶이 온통 복음으로 변화되고 있어. 이렇게 어려운 세상 속에서, 환란 속에서.

 

3. 그렇다면 과연 데살로니가 교회 사람들이 환난 중에서도 복음으로 승리하고 있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환난 속에서도 복음이 오히려 세상을 압도하고 승리를 선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기독인인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물음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5절에 보면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복음이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것이 단순히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을 체험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우리 가운데 큰 확신으로 다가오는 말씀을 체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이 우리 마음 속에 다가와서 눈물 흘리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남아서 우리의 삶을 강력하게 인도하는 경우가 있으십니까?

신앙 생활을 하면서 그런 체험을 해 보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냥 말씀 자체에만 머물러 있고 우리 삶 가운데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여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경험을 못 해본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고, 세상을 이길 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뿐만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달되도록 역할을 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5절 후반부에 보면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라는 사람들이 데살로니가교회 사람들과 같이 지내면서 그들이 복음이라는 것이 단순히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이 있는 것이구나라는 것을 보면서 이들의 삶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GNB는 5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당신들에게 전했는데, 말 뿐만 아니라 능력과 성령으로 또한 그것이 진리라는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전했다. 당신들은 안다. 우리가 당신들과 함께 있었을 때 어떻게 살았는지. 이것은 모두 당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한 일이었다.

6절은 바로 이렇게 시작합니다.

당신들은 우리와 예수님을 본받았고 심지어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그 말씀을 성령으로부터 오는 기쁨으로 받았다.

즉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실제로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과 같이 살면서 삶으로 말씀이 얼마나 성령의 능력이 있는지, 완전한 확신을 주는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성도들은 그들을 본받으려고 했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4. 제 믿음의 길을 돌아보니까 저도 믿음의 본을 보여주는 사람, 믿음의 본이라는 것이 그냥 단순히 지적으로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삶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그 말씀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능력있게 이끌고 가는 지를 보여줬던 사람에 의해 하나님 말씀이 이런 것이구나 하나님은 살아계시구나 이것에 내가 모든 것을 걸 만하구나라는 것을 느낀 것 같습니다.

즉, 복음이라는 것은 삶을 붙들고 변화시키며 담대하게 설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있을 때, 저는 거기에 있던 저의 리더들을 보았습니다. 많은 어려움이 다가와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을 붙들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 말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돈이 없어도 말씀을 붙들며 말씀에 감격하고 말씀으로 이겨낸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또한, 삶에 있어서 잘못을 저지를 경우, 죄를 지을 경우 예를 들면, 거짓말을 하지는 않지만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 하면 즉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을 만났다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말씀들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켰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들의 삶을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분들이 하신 말씀이 저에게 사실로 다가왔습니다.

보십시오. 성경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교 진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거짓말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거짓말 하는 사람들을 싫어하시며 벌하십니다. 그런데, 바울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난 것을 거짓말 할 것이며, 많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며 목숨까지 바치던 사람들이 어떻게 거짓말을 할 것이며, 그들을 옆에서 지켜보던 데살로니가교회 사람들이 삶에서 향기가 드러나던 그들의 메시지를 어떻게 거짓말일 것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로 당당하게 서며,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있게 그들에게 다가오며 그들은 바울등이 전한 메시지를 확신 가운데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환난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복음이 주는 능력 가운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5. 저는 개인적인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공동체에 말씀이 능력이 되어 삶 가운데 붙들고 있는 것을 체험한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 사람들을 보면서 도전을 받아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공동체가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의 소문이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그 시작은 단순한 데서 비롯됩니다. 말씀의 능력이 어떤 지를 체험한 사람에게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앙 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이 어떤지를 체험하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직분을 갖지 않으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직분을 갖고 안 갖고가 아니라, 이 공동체에 머물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렇다라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실 분들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살 때 내 삶이 이렇게 변한다라는 것을 그냥 사람들이 보게 해 주면 우리들의 믿음이 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삶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땅 가운데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있을 때, 그것이 하나의 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것이다라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거친 세상 속에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사단의 그 유혹속에서도 예수님은 사람은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 말씀으로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자녀로 당당하게 세상 가운데 나간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지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신뢰속에 제자들도 세상에 나가서 자신들의 삶이 예수님에 의해, 성령에 의해 송두리째 바꾸어지는 놀라운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의 제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6.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저에게 말씀이 이렇게 능력이 있는 것이구나를 삶으로 보여 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그걸 알게 되고 그 사람의 삶도 그렇게 되었을까? 아마 그 사람에게 그런 영향력을 전해 준 어떤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도 또 어떤 사람이 그랬을 것입니다. 자꾸 위로 올라가면 그 맨 위는 누구이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는 복음이 살아 있는 능력이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삶에서 같이 보며 배웠던 사람들로부터 시작되는 흐름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연결되어 옵니다. 여러분들은 복음이 능력임을 삶에서 나타나는 그 라인에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믿음의 족보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실제로 살았고 믿음으로 능력 가운데 세상을 이겼던 사람들의 라인입니다. 이 믿음의 라인을 아브라함의 라인이라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라인이라고 합니다.

 

7. 동막교회 청년부 속에서 저는 그런 사람들을 몇몇 보았습니다. 삶에서 어려움들이 끊임없이 밀려오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말씀을 부여잡고 절대 포기하지 않으며 그 말씀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세상을 이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단 하나의 부분이라도 말씀이 이렇게 내 삶을 변화시키고 내가 말씀에 의해 이런 부분에서 승리하고 있습니다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환난 속에서도 말씀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런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셨다면, 주님께 간구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저의 삶의 한 부분이라도 변화시키는 것을 체험하길 원합니다. 여러분이 그 승리의 체험을 할 때 여러분의 신앙은 죽은 신앙이 아니라, 살아서 역사하고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다는 것을 여러분이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말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은 세상을 이깁니다. 말씀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들이며세상을 이긴 믿음이 스스로 세상에 퍼지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냅니다. 전도는 믿음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믿음이 승리하는 것을 보여주지 못한 사람이 하는 어떤 이야기도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능력있다는 분임을 증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공부하는 과정에 있어서, 그냥 그 시간을 땜빵 식으로 보낼 것이 아니라 절실히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이 말씀을 통해서 말씀이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능력으로 다가오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그 능력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을 가지시고 주님을 기대하십시오. 우리 삶 가운데 놀라운 말씀의 능력을 보여주실 것이며, 그 능력을 체험할 때 우리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깁니다. 우리는 그런 믿음의 사람으로 부름받았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AND

 예수님의 용서

마태복음

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1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18: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18: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18: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18: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18: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18: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18: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18: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18: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18: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오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할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의 앞 부분을 보면 예수님은 계속 다른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지 말아라, 상처주지 말아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상처주는 행동을 우리의 몸의 한 부분을 통해서 한다면 그것을 없애버리라는 말까지 합니다. 18장 10절에 보면 아무리 작은 자라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2절부터 보면 잃은 양 한 마리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14절에 보면 그 이유가 작은 자 중에서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5절부터는 형제가 죄를 범하면 그 사람을 바로잡게 하기 위해서 여러번 노력을 기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을 용서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가 베드로가 갑자기 끼어듭니다. 그리고는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우스꽝 스럽고 분위기 파악 못하는 질문을 합니다.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베드로를 보면 많은 생각이 납니다. 베드로는 알다시피 마음의 표현이 풍부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실수도 참 많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람이 게바 반석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실수를 참 많이 합니다. 공동체에서 성경 공부를 해도 어찌보면 쓸 데 없는 질문을 많이 던지고, 자기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이런 사람은 분위기를 해치는 사람 같고 진지함이 결여된 사람처럼 보입니다. 교회에 좀 드문 드문 나오라고 말하고 싶지만 끈질기게 열심히 나옵니다. 그에 비해 다른 사람은 교회에 드물게 나오지만 진지함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스타일이 더 바람직하다고 보십니까? 저는 전자와 같은 사람, 즉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 앞으로 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우린 처음에는 다 엉뚱한 질문을 던지고 하나님의 말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베드로처럼 꾸준히 붙어 있으면 자연스럽게 열매가 맺히며 바로 게바 반석이 되어 갑니다. 베드로는 그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좌우지간 베드로는 7번 용서하면 됩니까라고 말합니다. 이 당시 관습으로 3번 정도의 용서는 대단한 용서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무려 7번 정도 용서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오버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아마 칭찬받으려는 마음이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예수님이 용서하라고 말하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래, 내가 여러번 용서하는 것이 용서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여기서 형제라는 표현을 보셔야 하는데, 형제라는 표현은 나랑 가까운 사람을 의미합니다. 나랑 먼 사람이 나에게 상처 입히고 잘 못 했을 때는 용서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나랑 가까운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입힐 때 많은 괴로움이 우리에게 밀려 옵니다. 그리고, 정말 마음 굳게 먹고 또 먹어서 한 번 용서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나를 배신하고 상처 입힐 때 여러분은 얼마나 용서하겠습니까?

 베드로처럼 7번 용서하겠다고 당당하게 선포하는 것도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려 7번을 70번까지라도 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7번을 70번이나 하라는 말은 490번을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7번도 힘든데, 490번을 나랑 가까운 사람들이 아주 큰 상처를 입히는 것을 용서하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즉, 아예 그 사람에 대해서 용서하는 숫자를 세는 것을 포기할 만큼 용납하라는 말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놓아주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주변의 어떤 사람이 상처를 입혔을 때 몇 번을 용서해 주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마음의 앙금이 남아 있고 그 사람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고 있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를 들고 계시는 데, 어떤 종이 임금에게 만 달란트 빚졌습니다. 그것을 갚지 못했고 그 종이 하소연합니다. 왕은 그것은 보면서 27절에 보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고 그 모든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빚을 탕감한다는 말이 여러분 실감이 나지 않으시죠? 만 달란트면 6000만일을 일해야 갚을 수 있는 돈입니다. 즉, 그 사람의 식구가 전부 평생을 일해도 갚을 수 없는 어마 어마한 돈입니다. 얼마전에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난 탤런트 한 분도 40억이라는 돈 때문에 자살이라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40억이면 평생 일해도 갚기 힘든 돈입니다.. 그런데 약 3000억이라는 돈을 빚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많은 압박이 가정에 들어옵니다.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런데, 임금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그 모든 빚을 갚지 말라고 변제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홀가분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종은 자신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사람, 즉 100일 정도 일하면 갚을 수 있는 돈을 빚진 사람의 하소연도 무시한 채 옥에 가두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임금은 분노하게 되고 이 사람을 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35절에 무엇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까?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값으로 셀 수 없을 만큼 용서를 받았으니 우리들도 우리에게 상처 입힌 사람들에 대해서 그냥 그것을 몇 번이라는 숫자로 한정시키는 용서를 하지 말고 또는 용서 안 하는 행동도 하지 말고 아예 마음으로부터 놓아주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용서는 바로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왜요?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정말 말할 수 없는 큰 사랑으로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가끔 아내랑 싸움을 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잘못한 일에 대해서 잘 잊어버립니다. 아내는 저보다 똑똑한 사람입니다.^^;;;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기억력이 좋다고 하기 때문에 아내도 마찬가지로 제가 했던 말들을 잘 기억하고 부부 싸움할 때 써 먹습니다. 과거 이야기를 꺼내서 저의 잘못을 지적할 때 저도 과거 이야기를 꺼내서 써 먹고 싶은데 도무지 생각이 안 납니다.

 그런데, 이 일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약 나의 죄를 계속 기억하신다면 나의 마음은 어떨까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뭐 잘못할 때마다 저에 대해서 계속 공격하면서 너 과거에 이랬지? 이랬지? 이러면서 계속 저의 과거 잘못을 끄집어 내며 저에게 뭐라하신다면 저의 마음은 정말 무너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그 용서는 마음으로부터의 용서이며 모든 것이 해결되는 용서라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사야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말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용서가 바로 마음으로부터 모든 것을 놓아주신 그 용서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많은 사람들과 같이 하시며 기쁨과 고통을 같이 나누셨습니다. 어려운 것들이 있으면 어느 하나 그냥 넘어가지 아니하시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 아파하시고병든 사람들을 고치시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부인하며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까지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끝까지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용서가 진정한 용서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번주에 소년부 김** 전도사님과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전도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용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라는 말입니다. 제가 그 말을 들으면서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용서가 그토록 중요할까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용서에 대해서 이해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용서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용서를 해야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실 것이라고 강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용서를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주기도문도 그와 같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여로부터 시작하는 주기도문에서 보면 다른 모든 말은 -해 주시옵고라고 말하고 있는데, 용서에 대한 것 만큼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이 나오는 마태복음 6장 9절부터 보면 13절까지 우리가 외우는 주기도문인데,

14절부터 바로 이어서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할 것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주기도문을 이야기하면서 바로 이어서 한번 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토록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의 사랑이 용서라는 방법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우리가 용서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들에게 전달되며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구원받게 되는 가장 큰 통로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젠가 저에게 가장 큰 상처를 입힌 사람이 있습니다. 저의 의도를 파악하지도 못하면서 계속 저를 몰아붙였습니다. 그런데 제 안에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저는 그분을 찾아가서 오히려 제가 잘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그 분이 저를 쳐다보는 눈빛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를 다시 보는 그런 눈빛이었습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용서할 때 상대방은 여러분들을 다시 보게 되며 의문에 쌓이게 됩니다. 내가 볼 때 그런 행위를 당하면 도무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용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끝까지 누군가를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하고 섬길 때 그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짐 엘리엇이라는 선교사의 일대기를 본적이 있습니다. 짐 엘리엇 선교사와 친구들인 동료 선교사들은 아마존 정글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부족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어느 날 강에서 창이 꽂힌 채로 남자 선교사들이 다 죽어서 발견되었습니다. 부인들과 아이들은 그 충격적인 장면을 보고서 그 곳을 떠나서 본국에서 계속 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들에게 돌아와 부족 사람들을 용납하고 그들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 알 수 없는 용서와 사랑이 부족 사람들에게 전달되었고, 그들이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채프먼이라는 미국의 가장 유명한 ccm 사역자중 한 분이 그 부족 사람 한 사람과 함께 찬양을 불렀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찬양을 불렀던 바로 그 부족 사람이 선교사들을 창으로 찔러 죽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기가 Godfollower가 됐다고 간증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살인자가 이제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고, 짐 엘리엇 선교사의 아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용서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용서가 우리 가운데 이해되지 않는 의문을 가져오게 되며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용서는 몇 번 용서하는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놓아주는 용서였습니다.

 힘들어도 여러분들이 주변의 형제들을 나에게 상처 입힌 사람들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해 줄 때 여러분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것이고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용서에 대해서 물으면서 아마도 자신은 용서의 의미를 잘 몰랐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캐릭터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의 일생에서 예수님의 용서를 이해하는 사건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강력하게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다시 나타나 나의 양을 먹이고 치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베드로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믿어주시는 그 용서,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케 하는 그런 용서를 해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는 정말 반석이 되어 끝까지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 사랑을 전하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공동체에는 여러분들이 보기에 미숙하고 실수하고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니, 여러분 주위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유 없이 여러분들을 미워하고 괴롭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할 때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용서할 때 여러분은 또한 하나님의 용서가 나에 대해서 어떠했는지를 알게 되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동행 가운데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용서를 배우면서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그 값어치를 더더욱 알게 되었습니다. 저에 대해서 하나님은 얼마나 실망하시고 가슴 아프시고 그러셨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기를 결정하시고 저를 끝까지 그 분의 마음으로부터 저를 용서하시고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저를 살게 합니다.

AND

어떤 것을 옳고 그르다고 명백하게 편을 갈라 이야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을 뿐더러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는 일이라서 좋아하지 않습니다.
요새 기독인 학교를 따로 만드는 것에 대한 움직임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좋은 점도 있고 단점도 있습니다.
이 세상 가운데 면역이 약한 사람들에게 미리 예방 주사를 맞혀서 강하게 만들어서 세상 가운데 보내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많은 효과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제 의도를 실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수도 있습니다.
평생 기독인 문화에 갇혀서 편협된 시각을 가지고 살 수도 있으며, 세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 우월감을 가지고 사는 편협된 기독인을 만들 소지도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변에 기독 학교를 나와서 정말 편협된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기독 학교가 아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인정하는 뛰어난 학교는 그들에게 우스운 학교로 취급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자기가 다닌 기독 학교는 하나님의 학교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학문적 성취가 뛰어난 학교를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리주의자적 생각이고 근본주의적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문화에서만 자란 사람들은 왜곡된 생각을 많이 갖고 있어 안 믿는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교회 안에서 사랑의 메세지만 듣고 자신이 사랑받아야 할 대상이고 자신의 잘못은 다른 사람들이 용납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 사람들의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오히려 왜 내 잘못을 용납하지 않느냐라고 세상을 향해 비난합니다.

또한, 하나님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가는 사회를 만드는 것을 소홀히 여깁니다. 그러다보니 정 없다는 소리도 듣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겸손하게 섬기며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계시고, 태초부터 공동체 가운데 사람을 두셨습니다. 같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세상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사람에 대해서도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그들에게 다가가겠습니까?
기독인들만의 공동체, 그 편협된 공동체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하나님을 기독인만의 하나님으로 축소시키는 우를 범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기독인 뿐 아니라, 비기독인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선민 의식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본 뜻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마태복음 공동번역
5:44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5:45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5:46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5:47 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5:48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AND

본문 레1:1-3;요4:22-24;롬12:1-2;히13:15-16


오늘 우리는 교회와 신학에서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하는 문제 제기에 다시 직면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예수 믿고 세례 받고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 성도로 부름심을 받았고, 그리스도인은 평생 예배자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보면 예배는 인간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서 자기 생각대로 자기 마음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이며 하나님의 요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예배는 인간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거나 소원성취를 하기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 반대급부로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이 원하는 그 무엇을 받아내려는 어떤 ‘주고받는 거래’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매 주일 예배를 드리고, 또 기회 있는 대로 자주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정작 ‘예배가 무엇이고,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라고 물으면 그 대답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예배의 본질과 예배의 형식과 예배의 역사와 그 변천에 관해 모든 것을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 읽은 성경의 분문 말씀에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에 관해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성경에서 ‘예배의 책’으로 알려져 있는 레위기의 첫 머리인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1장 1절 이하에서, 예배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면 누구에게나 개방되고 허락된 하나님이 주시는 특권이요 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하나님께 예배(예물)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예배에 어떤 신분, 계급, 학식의 유무, 성별 등의 차별은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원칙은 예배는 누구나 드릴 수 있지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도록(열납하시도록)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레위기는 그럼으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제사)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그 원리와 정신과 규칙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보면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예배(제사)는 드리는 데, 많은 경우에 잘 못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오히려 하나님이 싫어하고 미워하시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다소 과격하다고 할 정도로 책망하였습니다(예컨대, 사1:10-17;암5:21-24; 미6:6-8; 말1:6-10 등).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예배를 비판한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너희가 드리는 그런 예배를 계속 드리려면, 차라리 두 번 다시는 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제사보다 인애”를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호6:6). 잠언서에서도, “제사 드리는 것 보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을 여호와계서 기뻐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잠21;3). 사무엘 예언자는 “번제와 다른 제사보다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시며, “제사보다는 순종”이 더 낫다고 말씀했습니다(삼상15:22). 이런 말씀을 다 찾아서 소개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이웃과의 진정한 화해와 용서가 없는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예배는 잘못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예배는 순서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예배자의 정신과 마음과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습니다. 제물이 먼저가 아니고 그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이 점을 우리는 오늘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는 예배자의 마음과 태도가 예배 그 자체나 어떤 예물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여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의 머니이다.”라고 했습니다(렘12:2). 오늘 우리도 교회당에 모여 예배는 자주 드리고, 입으로는 주님을 찾지만 마음은 멀지 않은지 마땅히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배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장 아름다운 표현이며 세상을 향한 증언입니다. 어느 신학자가 예배를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예배는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응답이며, 초월에 대한 승인이며, 하나님의 자유활동에 대한 우리의 전적인 의존이다.” 예배는 오늘도 우리가 성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창조주시며 이 세상 역사의 주인이시고 구원자이심을 고백하고 인정하며, 그 하나님을 만나며 찬양하고 경배하고 감사하면서, 그 하나님과 기도로 대화하며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오늘 아침 본문 요한복음 4장 22절 이하에서 우리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과 대화하면서 예수님은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예배는 드리지만 왜 예배를 드리는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방 종교에서 이방인들이 드리는 제사(예배)는 귀신들(다이모니오이스, 즉 to demons)에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고전10:20). 참 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귀신에게 드리는 줄도 모르고 잘못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끔직한 일이며,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까? 우리 주위에서 보면 과학문명이 발전된 21세기에 아직도 삶은 돼지머리를 갖다놓고 거기에 절하고 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말 영적으로 무지하고 불쌍한 일입니다. 바울 사도가 아테네의 아레오바고 언덕을 방문했을 때, 그 주변에 많은 제단들이 있는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 드리는 제단도 보았다고 합니다(행17:23). 옛날에만 있던 일이 아닙니다. 우리도 안다고 하지만, 혹시라도 알지 못하고 예배를 드리는 경우는 없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에게 예배는 “장소”가 문제가 아님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이나 그리심 산은 참된 예배와 본질적인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참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육신하셔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그 곳이 진정한 예배의 자리이고 그 곳이 교회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그들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알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시대에는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한시적으로 가축을 제물로 잡아 그 피를 드리는 모세의 율법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와 만민의 죄를 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친히 자신의 피를 흘려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제사 예배를 폐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배의 진정한 본질을 확증하시고 성취하셨습니다(히7:27-28;9:11-14;10:10-18). 그래서 우리는 이제 바울 사도가 로마서 12장 1절 이하에서 전하는 말씀대로, 더 이상 죽은 제물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산 제물로“ 우리 하나님께 영적인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합당한) 예배가 무엇인지 세 가지로 말씀했습니다. 첫째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NLT: 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둘째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사람이 변했다는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선택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참 예배는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이 아니라, 예배자의 마음과 삶의 변화와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 요한복음 4장 23절로 가서 보면, 예수님은 참된 예배를 드리려면 “영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영과 진리로)”드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엔 프뉴마티 카이 엔 알레데이아, in spirit and in truth)”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이해하셨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 마다, 수가성 여인이 한 번 더 물어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영안에서 그고 진리 안에서”드리는 예배입니까? 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없고, 수가 성 여인이 기다리고 있는 그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의 문맥에서 이 말씀의 의미를 찾아보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안에서 예배드리라고 한 것은, 바꾸어 표현하면 예배는 하나님(즉, 영) 안에서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예배는 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되고, 언제나 하나님 중심이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참된 예배는 내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변화가 없는 예배는 잘못된 예배입니다. 또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그리스도인과의 관계를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안에”라는 말씀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요14:20;15:4;17:21 등).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키며(요14:6), 진리는 언제나 빛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요1;4 이하). 그러므로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는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빛으로 드러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의 기본 정신은 이미 구약 레위기의 제사법에서도 드러나 있는 원리입니다. 특히 레위기 1-7장에 있는 레위기 5대 제사는 “예수님이 말씀한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저는 이 레위기 5대 제사법에 나타난 예배의 정신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과 진리의 예배와 연결하여 잠시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모세 율법인 레위제사법의 첫째는 번제입니다. 번제는 예배자가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를 잡아서 제사장이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그 제물을 제단에서 완전히 불살라 연기로써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제사입니다. 피를 뿌리는 것은 죄(원죄)를 사하는 의미입니다. 번제의 핵심은 대신 희생을 당한 제물을 통해 예배자가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자의 자기위탁이며 자기부인의 정신입니다. 나와 내게 속한 모든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며, 나의 주인이라는 고백이고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번제의 제사를 온전하게 이루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확인하는 예식인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영안에서” 즉 하나님 안에서 드리는 예배의 의미이며, 번제의 예배입니다. 번제의 예배는 내가 주인노릇 하던 삶에서 이제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는 삶으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예배정신이 오늘 우리의 예배에서도 살아있기를 기원합니다.

둘째는 소제입니다. 소제는 가축을 제물로 드리는 피 제사가 아니고, 곡식이나 처음 익은 열매를 예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소제의 제물로는 특히 “고운 밀가루”를 드리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 밀가루로 만든 빵(떡)을 드리는 것이 소제의 핵심입니다. 소제의 정신은 그러므로 예배자가 마치 고운 밀가루가 되고 떡이 되는 것 같이, 하나님을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의 정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이 떡을 먹는 사람은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요6:35,51). 소제는 바로 성육신의 제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본받아 이 세상에서 한 알의 밀알로 썩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소제는 자기희생과 봉사의 정신입니다. 소제의 예배는 그러므로 이기주의적인 삶에서 이타주의적인 삶으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진리 안에서 빛으로 드러나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과 진리 안에서”드리는 예배는 무엇보다 번제와 소제의 정신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번제와 소제는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매일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예배의 가장 기본이며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모든 헌신예배는 사실 번제와 소제의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레위제사법은 때에 따라드리는 다른 세 가지 종류의 제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번제와 소제에 따라오는 세 번째 제사는 화목제입니다. 화목제는 감사할 때와 서원이 이루어 졌을 때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화목제의 특징은 하나님과 제사장의 몫으로 제물을 드린 후, 남은 제물을 가지고 가족과 이웃과 함께 잔치하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화목제의 정신은 나눔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복과 은사와 은혜를 이웃과 나누는 것이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얼마나 나누어 주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누는 삶이 곧 예배라는 사실을 아셨습니까? 사도행전의 교회가 부흥한 비결 중에도 서로 나눔이 있었습니다(행4:32 이하).

넷째는 속죄제입니다. 속죄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부지중에(육신이 연약하여) 죄를 지었을 경우, 그 죄를 깨달았을 때 속죄를 위해 드리는 제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때로는 원하지 않는 죄를 범할 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배시간에 우리는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참 예배자의 태도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까지 말했습니다(딤전1:15). 언제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이 침 된 예배자의 모습입니다(눅18:9-14 참조).

다섯째는, 속건제입니다. 속건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채권자가 아니라 채무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속건제는 하나님의 소유나 이웃의 소유를 침해한 죄를 속죄하기 위한 제사입니다. 율법은 손해를 끼친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그 소유주에게 갚고, 속건제물을 드려 그 죄를 용서받도록 하였습니다.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의 경우가 이 속건제를 이해하는데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셔 들였고, 예수님의 구원의 선언을 듣고 감격하여, 자신의 소유를 팔아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다른 사람의 재물을 빼앗거나 손해를 끼친 경우에는 4배나 갚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진정한 속건제 예배의 정신이며 예배자의 삶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과 부모님과 창조세계와 국가와 이웃과 여러분들에게 직접, 간접으로 신세를 지고 빚을 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언제나 빚을 갚겠다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진정한 예배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구약의 예언자들이 잘못된 예배에 대해 과격할 정도로 책망한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예언자들이 거짓 예배에 대해 책망한 것은 성전에서 드리는 경건한 예배와 일상의 생활이 너무나 괴리된 것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예배가 일상생활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수 백 번, 수 천 번 예배를 드려도, 예배자의 인격과 일상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경건한 예배의식에는 참석하는데 그 때 뿐이고, 하나님 없는 가정생활, 하나님 없는 직장생활, 하나님 없는 학교생활, 하나님 없는 사회생활, 하나님 없는 경제생활, 하나님 없는 정치생활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예배고, 이런 것이 거짓 예배라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연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오늘 21세기 현대 예배를 위협하는 네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종교다원주의 신학사상과 함께 침투하는 이방 종교들의 영성과 예식의 영향입니다. 예컨대, 우리 한국교회 예배에는 샤머니즘적인 요소들과 불교나 유교적인 요소들이 침투하고 있거나 침투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스라엘의 예배에는 바알 종교가 언제나 큰 위협이었고, 신약시대 이후에는 영지주의 사상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둘째는, 신앙과 생활이 유리된 예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생활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문제입니다.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을 구별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알지 못하고 드리는 습관적인 예배입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왜 예배를 드리는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모르고 드리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예배자의 신앙성장과 생활의 변화가 없거나, 너무 느리게 진행되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는 대체로 예수 믿는 다는 것, 예배드리는 것 자체가 점점 부담스럽게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는, 세속주의의 영향입니다. 기독교 신앙과 예배도 오늘 21세기 세속문화의 한 유형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배도 오늘 현대인의 취향과 입맛에 맞도록 적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예배의 요구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고, 예배가 현대인의 종교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된 예배는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위기의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든지, 하나님이 싫어하고 미워하시는 예배를 드리게 되든지, 두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마다 다소 긴장감을 느끼고, 어느 정도 위기의식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하나님이 찾으시고 기뻐하시는 예배는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드리는 예배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장소가 문제가 아니고, 겉으로 드러나는 예배순서나 형식이 큰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예배자의 정신과 마음과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드리고 그것으로 끝나는 예배가 아니라, 예배자의 인격과 일상의 삶을 통하여 죄에 매여 종노릇 하던 과거에서 돌아서는 새로운 변화가 있고, 이 어두운 세상에서 예배자의 삶이 빛으로 드러나는 그러한 예배를 드리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히브리서 13장 15절 이하의 말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예배)를 하나님께 드리자(시69:30-31 참조).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호14:2 비교). 오직 선을 행함(여기서는 특히 친절한 언행)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예배)를 기뻐하느니라.” 여기서 찬송은 예배순서에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 이러한 일상의 찬양과 평소에 친절한 언행과 서로 나누어 주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된 예배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배가 바르게 되면 , 우리 가정도 바르게 되고, 우리 교회, 우리 학교, 우리 사회, 우리나라도 바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출처 : http://pcts.ac.kr/suggestion/sub_2_1_view.asp?seq=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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