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많은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가 모두 하나님의 진리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설교에 하나님의 진리가 전혀 담겨있지 않다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설교를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저 분의 설교는 왜 저럴까? 별로 성경적이지 않은 것 같아라고 말한 적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설교자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를 생각하는 문제와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은 믿는 사람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교훈하시며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게 믿는다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설교자를 바라보는 태도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쓰신 사례들을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렇다면 설교자가 성경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느껴지더라도 그 전체 메세지에 전혀 하나님의 메세지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설교의 30-40분을 듣는 동안에 대부분에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메세지라고 생각하며 아예 귀를 닫는 것 하고, 그 중에서도 혹시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은 없을까 생각하며 듣는 것 하고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할까요?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상관없는 말씀은 새기지 않으면 될 것이고 진리가 있는 부분이라면 마음에 새기면 됩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 하나님께 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달라고 기도하면서도 막상 설교할 때 자의적인 생각이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할 때도 그 안에 성경적인 것들이 안 들어갈 요소가 분명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메세지의 부분들이 하나님의 생각을 담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신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사상이 다른 신학자의 이야기는 전혀 가치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안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는 부분들이 분명 있습니다.
나와 다르다고 아예 배척하는 것보다 그 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욱더 밝혀 주시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나가는 것이 보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바람직한 과정일 것입니다.

나는 맞고 너는 전적으로 틀리다.
이런 것처럼 유치한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런 유치함이 우리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는 모습들을 우리는 흔히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심을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는지 우리는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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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깊게 살펴봐야 하는 것은 공동체의 질서와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하나됨과 공동체를 성장하도록 섬기지 않는 은사는 어찌 보면 헛된 것이라고 고린도전서는 말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고린도전서를 보면 성령은 철저히 공동체를 위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에 약한 지체도 있을 것이고 믿음이 강한 지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에게 주신 은사를 통하여 서로를 섬김으로써 성장해 나갈 수 있습니다.


12: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2: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2: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2: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2: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2: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12: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12: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12: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12: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12: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12: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12: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12장 26절에 보면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래의 그림으로 그려볼 수 있습니다.
제 컴퓨터로 그린 것이라서 명확하게 그리진 못했는데 양해 바랍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하나의 원이 아닌 다원으로 그렸습니다. 영향력을 표현하기 위한 방식이지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우리는 다 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지체가 아프면 우리도 아프게 되어 있습니다.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깊게 영적 교제를 나누는 사람이 경건하게 살지 못하고 죄악 가운데 물들어 있다고 본다면 그 지체의 죄악에 대한 영향력은 또한 나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묶어 주신 각각의 그리스도를 몸으로 한 하나의 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원들은 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으로 부터 영향력이 그래도 덜한 원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나와 relationship이 어느 정도로 형성되는 공동체인가를 보면 됩니다.
가장 가까운 그룹은 가족입니다.
가족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연결된 가장 나 자신과 가까운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가족이 아픔을 겪으면 나의 영적인 부분에 가장 직결탄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상황들을 보십시요. 가장 영적으로 아픔을 겪거나 기쁠 때는 가족과의 영적 교제와 관련된 부분입니다.
그 다음 그룹은 지역 교회 공동체의 소속 부서가 될 수 있겠습니다.
이 부서의 부원들의 영적 생활은 가족 보다는 영향력이 적겠지만 그래도 지대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다음은 지역교회, 그 위는 한국교회, 그 위는 세계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힘든 것은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타락들이 나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잘 생각해 보십시요.
내가 영적으로 잘 자라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와 같은 공동체에 있는 지체들이 영적으로 성장해야 하고 건강하게 자라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 몸의 한 지체가 아프면 다른 부분도 같이 아픈 것이지 결코 분리된 부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공동체를 비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같이 성장하기 위한 비판이 되어야지 도려내기 위한 비판이 되면 그곳은 나에게도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 곳이 정말 썩어버렸다면 어쩔 수 없이 수술할 수도 있겠지만요.

예수님도 요한복음에서 마지막 기도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분리될 수 없는 영적으로 같은 배를 탄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는 나를 위한 기도가 되는 것이며, 나의 하나님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 안에서 같이 성장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이런 공동체 속에서 성령은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AND

귀납적 성경 공부는 분명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성경 공부방법입니다. 성경을 이 방법을 제외하고 이해한다면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을 하게 되며 이단으로 빠질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고 해서 귀납적 성경 공부가 완전한 성경공부냐 그렇지 않습니다.
귀납적 성경 공부의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귀납적 성경 공부는 인간의 좌뇌 영역을 주로 사용합니다.
즉, 이성적, 논리적인 접근을 중요시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
말만 듣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의 감정, 분위기 등등 여러 가지를 고려하게 됩니다.
감정적인 영역은 우뇌적인 부분입니다.
이 부분이 성경 구절을 단순히 귀납적으로 분석할 때 고려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좌뇌적인 부분과 우뇌적인 영역을 동시에 사용할 때 성경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귀납적 방법에서 그 당시 상황을 유추하고 그것을 토대로 그 때의 상황에 대한 상상력을 추가하여 성경의 본문을 제대로 살아나게 할 수 있습니다.

이 상상력은 자기만의 상상력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납적인 방법에 의해 허용되는 한도내에서
상상력을 사용해야 할 때 지나친 해석을 막을 수가 있고
문맥자체가 보여주는 것 이상의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AND

귀납적 성경공부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귀납적 성경공부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왜? 입니다.
간단하죠!

즉, 성경에 어떤 구절이 있다면
그게 왜 거기에 들어가 있는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이런 질문을 찾는 과정입니다.
왜 거기에 들어가 있는가를 알기 위해선
앞 뒤 문맥을 살펴야 할 것이고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를 찾기 위해선
그 당시 상황을 알아야 하며 저자의 의도 청자의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상황과 비추어서 맞는 현실과 비교하여
하나님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지만
이것이 습관이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ywam에서 9개월동안 sbs를 하면서 남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 왜라는 질문이 습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귀납적 방법은 성경을 볼 때 아주 기초적인 작업입니다.
이것을 했다고 대단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성경을 보는 하나의 시작을 했을 따름입니다.

일부 목회자가 신대원을 졸업하고 sbs를 하면서 내가 신대원에서 배운 것이 없다고 말하는 분도 계시는데, 이런 말은 그분이 신대원에 다니시면서 충실히 공부를 안 하셨기 때문에 하시는 말입니다.

모든 주석적 작업의 기초가 바로 귀납적 성경방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런 귀납적 방법이라는 기초를 지켜서 성경을 보는 사람은 참 드뭅니다. 왜냐하면 뭔가 전문적이고 세련된 방법을 쉽게 찾으려는 경향성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기초가 가장 중요하지만, 알면 알수록 기초를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그럴 때 항상 넘어지게 됩니다.

피겨의 김연아 선수가 탁월한 실력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점프의 기초를 제대로 닦아 놓았기 때문에 항상 그것에 바탕을 둔 점프로 가산점을 받습니다.
이에 비해 마오 선수는 기술은 화려할 지 모르나 점프의 기초를 제대로 실현 못하기 때문에 한계에 부딪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기초는 항상 중요합니다.
내 신앙이 자랐다고 하면서 기초를 소홀히 하시는 분이 있는데
항상 기초를 튼튼히 세우고 다시 한 번 확인할 때 흔들리지 않게 말씀 위에 서 갈 수 있습니다.

왜? 라는 기초적인 질문을 가지고 성경을 보십시요.
내가 알던 부분도 다시금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 왜 여기에 이런 부분이 들어가 있지?를 반복해 생각해 보십시요.
여태껏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AND

설교를 하다보면 부딪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설교에 대한 부분입니다.
무엇이 성경적인 설교입니까?
성경 말씀을 많이 인용하면 성경적인 설교이고 그렇지 않으면 성경적이지 않은 설교일까요?
보통 사람들을 만날 때 마다 설교자가 설교하는 내용에 대해서 성경 구절이 많이 인용되지 않을 때 자기 생각을 나열하는 제대로 된 설교도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많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 또한 그런 생각에 많이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깊게 생각을 해 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보통 그 시점에 자신이 말하는 과정을 생략한 채-그 과정은 본인만 압니다.-결론적인 이야기를 꺼내게 됩니다.
그렇다면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의 그 현재의 시점의 말만 듣기 때문에 오해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그 말을 하게 된 과정을 모르기 때문에 들려지는 말만 듣고 판단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이란 것은 또는 글이란 것은 그것이 들려지거나 쓰여졌을 그 당시까지 이르는 과정과 절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다 그런 말을 한 의도, 그런 글을 쓴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은 결국 철수와 영희가 결혼해서 잘 살았다라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그 책의 내용이 뭐야라고 누군가가 물을 때, 철수와 영희가 결혼해서 잘 살았어라는 게 결론이야라고 이야기하는 것만큼 의미없는 답변도 없을 것입니다.
철수와 영희가 결혼해서 잘 살았다. 그런 text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 과정, 철수와 영희가 정말로 어려운 난관 속에서, 어찌보면 우리보다 더 힘든 과정 속에서 이렇게 이렇게 극복하여 결국은 결혼까지 이르게 되고 잘 살게 되었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이죠. 더 나아가서 지은이가 그런 글을 쓴 이유까지 생각해 본다면 의미는 더더욱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지은이는 왜 그런 글을 쓰게 되었을까요?
지은이는 아마 현실 가운데 사랑이라는 것이 모든 난관을 극복해 주는 중요한 요소이고, 독자 또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야한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일 겁니다. 즉, 철수와 영희가 난관을 극복하고 결혼했다 자체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 자체에 의도된 것이 더 큰 의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자체의 text가 있다면, 그 text가 쓰여진 의도를 찾아야 합니다. 왜 성경에 그런 구절이 있는가? 왜 이 부분에서 이 구절이 들어가게 되었는가? 왜 하나님은 이 말씀을 하시는가? 이런 과정을 겪지 않고서 어떻게 성경의 의미를 제대로 찾을 수 있습니까?

항상 말과 글에는 숨겨진 과정과 의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듣는 사람들을 위한 숨겨진 변화를 위한 메세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것을 찾는 것이 더더욱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은 신학자들이 계시라고 일컫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즉, 성경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무엇을 가르치길 원하시는가?를 찾는 과정이지요.
어떻게 보면 설교라는 것도 바로 text 자체가 있으면 그 과정과 그 과정과 결론에 이르는 연결점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찾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적이라는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성경 구절 많이 늘어 놓는 것이 성경적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의도와 그 과정 결론에 이르는 종합적인 것들을 다루는 것이 성경적이겠습니까?
성경 구절을 많이 늘어 놓지는 않아도 모든 일련의 과정이 하나님의 의도를 찾는다면 그것이 성경적이지 않을까요?
성경 구절이 아무리 많이 인용되었더라도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것이 성경적일까요?

잘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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