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bert

God follower 2006. 7. 11. 18:15
Robert... united kingdom 에서 왔고 Irish 임을 강조한다.
알다시피 영국은 연방국가이니까...
영국계 통신 분야의 가장 좋은 대학 중의 하나를 졸업했으며, 제일큰 통신 분야의 회사에 manager로 스카웃 되었던 사람이다.
나보다 나이 많아보이지만 한살 어리다.
그런데, 하나님이 중국에 대한 마음을 그에게 주셨고 선교사로 살기로 결정한다.
또,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회사에서는 너무 아쉬워서 대접을 더 잘 해 준다고, BMW 좋은 차도 주고, 집도 준다고 했는데 다 고사했다.
많은 연봉과 좋은 환경을 팽개치고, 페낭으로 와서 SOFM School을 하고 나와 보경 자매와 함께 SBS를 같이 했다.
SBS를 하면서 당장 살 돈이 없어서 struggling 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안쓰럽긴 했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며 믿음으로 기다리면서 신기하게 알 수 없는 많은 재정이 Robert에게 채워지는 걸 보면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우린 그를 로보트라고 부른다.
좌우지간...
그의 삶이 기대가 된다.

참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재주도 굉장히 많지만
언제나 찬양을 부르면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과 사랑이 넘쳐나는 형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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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많이 생각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내려놓음의 문제입니다.
권리포기란 말로 많이 불리고 있지만, 내려 놓음이란 말이 더더욱 좋은 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왜냐면, 내게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 것이므로, 내게 권리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그럼 제 안에 있는 내려놓음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저의 문제:
사실, 가난하게 살거나, 불편하게 살거나 하는 것은 오히려 쉽습니다.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이 어찌보면 저에게는 편안한 생활을 포기하거나, 고생을 해야 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그런 삶을 어느덧 추구하지 않았나 봅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막연한 반감 같은 것이 있습니다. 소위, 돈을 많이 가진 자들에 대한 반감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것에 대한 반감들...

과연 이런 행동이 옳은 것일까요?

예수님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와도 교제를 나누셨고, 아시다시피 삭개오는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부자 청년에게도 안타까운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그럼, 우리의 반응은 어찌해야 할까요?
이 사회 구조 간에는 너무나 큰 서로간의 갈등과 대립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젊은 이들과, 나이 드신 분들과의 대립,
보수 주의 진영과, 진보 주의 진영의 대립,
부자와 가난한 자들과의 대립...

서로가 서로를 이해 못하고 서로 자기의 생각들이 옳다고 하죠.
어느 것에도 답은 없습니다.

단지, 요구되는 것은 상대방을 편견없이 긍휼과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고, 친구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잘못된 행동에 대해 같이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죠.
예수님을 만나고 삭개오는 삶이 변화되었고, 잘못된 삶에서 돌이키게 되었듯이,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는 삶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함과 사랑으로 인해 마음을 열게 된 상태에서 잘못의 교정이 이루어졌던 것이지, 편견이나 어떤 비난에 의해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 제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을 바라보던지 간에, 그 사람에 대한 편견없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바라봐주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여 행동의 변화가 나타나도록 도와줘야 하는 것이겠죠.

내려 놓음에 대해 좋은 일화를 소개하죠.
예수전도단의 홍OO 형제님이 bedts 강의 때 이런 강의를 하셨습니다.
형제님은 외국에 강의가 있어서 누추한 여인숙에 묵을 때에도 마치 자기 집인양 편안하게 누리고, 혹시 좋은 호텔에서 묵을지라도 마차 자기 집인양 편안하게 누린다고...

빌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저는, 누추한 곳에서 잘 누릴 수는 있어도, 풍부함에 있을 때는 잘 누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환경에 있던지 간에, 하나님안에서 잘 누리고, 또한 무엇을 풍요롭게 받았다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해 잘 알고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내려 놓음의 좋은 실천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2006-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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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개는 두 장 밖에 되지 않지만 놀라운 책입니다.
작은데, 성경에 들어가 있는 것은 뭔가 놀라운게 더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개인적으로 갖게 합니다.

학개의 시대적 배경을 보면...
제 1차 바벨론에서 예루살렘 지역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정말 열심히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에스라나 느헤미야를 읽어보시면 알 수 있죠...
그들이 잠도 잘 안 자면서 열심히 노력했죠...
그런데, 갑자기 이들이 성전 짓는 것을 멈추기 시작합니다. 14년 정도 동안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학개 2장 4절 5절에 보면 하나님이 계속 마음을 굳게하라고 두려워 하지 말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성전 짓기를 멈춘 이유 중에 하나가 두려움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대적 배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스라에 보면 성전 짓는 것을 중단하게 된 이유가 나오는데, 그 당시 예루살렘 지역에 머물러 살던 사마리아인들이나 여러 이방인들의 박해가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 짓기를 중단하고 그들의 눈을 돌려 현실적인 만족에 안주하기 시작합니다.
학개 1장 4절에 보면 하나님의 전은 황폐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좋은 집에 거주하고 있고, 1장 6절에 보면 이들이 자기 자신의 만족과 필요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의 노력은 많은 것을 가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삶은 우리에게 참 의미를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이 말씀을 어떤 분이 성전 건축하는데 이용하며 마음의 일종의 죄책감을 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성전 건축이 우리의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하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성전 건축에 힘쓰라고...

하지만, 사실 학개를 인용하기엔 무리가 있는 말이죠...
학개 당시 사람들이 성전 건축에 마음이 많고 실제로 힘썼지만 두려움이 그것을 계속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던 거죠.

좌우지간,
그리고, 그들은 또한 자신들이 지은 성전을 보면서 규모가 보잘것 없음에 대해 실망을 느꼈습니다.(2:3)
하지만, 하나님은 성전 규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면 그 안에 얼마나 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성전은 이전 성전에 비해 초라하지만, 하나님은 그 영광이 더 클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2:7, 2:9)

저는 많은 기독인들이 선교사나 아니면 그런 쪽으로 풀타임으로 하면 헌신된 사람이고 그냥 직장에 머물러 있으면 뭔가 부족한 듯이 느끼는 그런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부족해 보여도, 다시 짓고 있는 이스라엘 성전 같이 초라해 보여도 그 안에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시고 임재하시면 그것이 얼마나 크고 천지를 진동시키는 영광이 있는지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외면적인 거대함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냐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곳에 있게 하시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하루 하루를 하나님께 함께 거하는 것. 이것이 하나의 부흥의 원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시 두려움의 문제로 돌아가면...

하지만, 하나님은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새로운 마음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내가 함께 한다. 용기를 가져라. 내가 함께 한다. (1:13, 2:4) 그리고 하나님은 그 영광스러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2:9)

전 학개를 보면서 바울의 삶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바울은 오로지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면서 모든 두려움과 고통들을 능히 감당했습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현실적인 상황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외형적인 거대함이나 이 세상의 부나 명예 등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바라보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리고, 영적인 의미를 잊기 쉽고, 하나님의 나라의 풍성함에 대해 잊어버린채 살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고, 그 영광의 풍성함이 얼마나 클지 생각한다면 어떤 것도 우리를 매이게 만들지 못하며, 우린 하나님의 자유함속에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삶 가운데 풍성하고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흘러 나오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물론, 학개는 이 외에도 다른 굉장한 의미가 있지만
저에게는 위에 적은 부분의 의미들이 많이 다가왔습니다.

이곳에 어떤 자매가 나눈 이야기가 많이 저에게 의미를 주어서 적어봅니다.

그 자매가 생일을 맞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림을 하나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그건 결혼식 장면인데, 저 끝에 예수님이 신랑(주례자 앞)의 위치에 있고 그 자매는 드레스를 입고 한 걸음 한걸음 예수님이 서 계신곳으로 다가가는 그런 그림이랍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예수님 있는 그 곳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얼마나 기쁘고 설레는 일일까요.
삶의 고통과 여러 가지 일들로 힘들지만, 그것을 이기고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는 우리들의 모습.
생각만해도 우리에게 소망과 힘을 줍니다.

빌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2006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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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룻기 teaching을 그룹별로 했습니다.
처음에 룻기를 읽었을 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몰라서 참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가르치긴 해야 하는데 뭘 초점을 맞추고 가르쳐야 하는지...
아무리 성경을 보고 또 보아도 룻이나 나오미의 삶-물론 좋은 점도 많지만-이 아주 하나님과 친밀한 상태였다고 보여지지도 않고...
자라면서 룻기를 읽었을 때 룻과 보아스의 러브 스토리를 들으면서 아름다운 이야기구나 생각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더욱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숨어 있었습니다.

룻기는 사사기의 일부분인데
사사기는 죄의 순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따르다가 하나님을 부인하고 죄의 길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어서 하나님이 사사를 보내서 구원하시자만 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떠나고 또 심판받고 부르짖고 또 구원임하고... 계속 그런 스토리입니다.

룻의 시어머니는 나오미입니다.
나오미의 이름의 의미는 pleasant(기쁨)입니다.
하지만 유다 가문의 나오미와 남편은 모압땅으로 갑니다.
모압민족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잘못된 관계속에 태생된 민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명기에서 모압자손은 절대 하나님의 공회에 들어올 수 없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오미은 그 잘못된 땅으로 가게 됩니다. 왜냐면 먹을 것을 찾아서지요...
하지만 그 땅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남편도 죽고 아들들은 하나님이 율법속에서 주신 이방여인들과 결혼했고 아들들마저 죽어버립니다.
나오미의 삶을 보면 참 비참하고 힘든 우리의 모습들이 떠올라집니다.
힘겨운 삶 속에서 무엇을 찾아 헤매지만 많은 것을 실패한 사람의 모습...
희망없음...
나오미 아들들의 이름도 참 재미있습니다.
말론의 의미는 -sicky 이고 기룐의 의미는 -failure 입니다.
자식의 이름을 지을 때도 나오미 자신의 처지를 반영한 이름을 지었으니 얼마나 나오미의 삶이 힘들고 괴로웠는지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룻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룻의 민족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들로부터 멸시받고 따돌림당하는 그런 민족에다가 더구나 혼자 되었던 모습들...
그의 삶도 보면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현재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도 이와 같을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룻의 동서는 오르바입니다. 오르바의 뜻은 neck 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목의 의미는 자신의 생각대로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교만함 결국 그 교만함이 하나님을 떠나게 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우상을 만들고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룻의 이름은 친밀감입니다. friendship

룻은 나오미에게 시어머니가 가는 곳은 설령 죽음이라도 무조건 따르겠다고 합니다.
저자는 유달리 둘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시로 하나님을 떠나고 그랬던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룻처럼 하나님에 대한 친밀감을 끝까지 유지하길 원했습니다.

어떤 고난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꼭 붙들고 나가는 것 이것이 룻기의 큰 하나니의 메세지인 것 같습니다.
룻이 나오미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갔듯이 말입니다.

한국에 휴대폰 광고중에 좀 섬뜩한 광고가 있었던 것이 기억나는데요...
여자친구가 남자친구의 등에 꼭 달라붙어서 절대 떨어지지 않는...
좀 섬뜩하지만...
좌우지간 하나님과 절대 떨어지지 않게 끝까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붙들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인 것 같습니다.

신약도 보면 같은 메세지를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 우리는 가지... 가지가 포도나무에 꼭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는 이야기...
예수님이 나의 길은 험한 길인데 그길을 따라 올 수 있느냐고 물으신 것들...
어떤 상황 가운데도 힘들어도 하나님을 꼭 붙드는 것... 중요한 것 같습니다.

지금 저의 상황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이곳 말레이시아의 생활은 생각보다 많이 힘듭니다.
날씨가 더워서 머리도 아프고... 환경은 열악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건강적인 부분들도 있고... (더 나눌 기회가 있겠지요...)

두번 째 중요한 메세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입니다.
보아스가 나타나는데요... 보아스는 나오미의 친척입니다. 친척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12번 정도 나오는데요... 그 의미는 구원자 입니다.
나오미는 스스로 자기의 이름을 마라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삶의 씁쓸함입니다.
만약에 나오미의 삶에 룻의 삶에 보아스(구원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들의 삶의 고통의 악순환은 어떻게 되었을 까요?
아마 계속 고통과 아픔속에서 희망없음 속에서 살았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보아스가 나타나서 그들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나오미의 삶은 마라에서 나오미로 바뀌었습니다. 씁쓸함에서 기쁨으로...

나오미는 한편 죄책감도 가지고 있던 여인이었습니다.
왜냐면 율법을 범했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와 룻의 결혼을 통해 그의 삶이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죄의 굴레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자... 즉 하나님,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

이 이야기는 신약의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와 굉장히 연관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삶에 희망없이 살았습니다. (요한복음 4:5~ 이야기)
그래서 예수님 외에 다른 곳에서 만족을 찾을려고 남자를 여러번 바꿨습니다.
만약 그 여인이 진정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을 만났다면 그 사람은 남편이 되어서 계속 함께 했겠지요...
인생에 피곤해서 그렇게 있을 때, 희망없이 다른 곳에서 해결을 찾을려고 했을 때, 결국은 실패했을 때,
예수님이 찾아 왔습니다. 내가 영원한 생수를 줄 수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나에게 해답이 있다.
그 여인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바로 그 redeemer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룻기는 희망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바로 소망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끝까지 친밀감을 유지하라는 메세지를 닮고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나오미는 이스라엘 사람이고 룻은 이방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구원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결국 룻기 마지막 장에 보면 룻의 자손을 통해 다윗이 나오고
마태복음 1장에서 보듯이 다윗의 자손을 통해 그리스도가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사랑...
하나님의 러브스토리...

나오미와 룻과의 관계와,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더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4:22 -이 부분은 저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적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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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의 정말로 놀랍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들... 이 세상에서 소망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모두를 하나님은 구원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희망과 우리의 위로이십니다.

말레이시아에서
여러분의 사랑을 받은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자
선기 드림...
200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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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창조하신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샬롬의 상태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탄의 유혹함으로 인해 죄에 빠져 들게 되면서 그들은 자신의 상태를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가장 아름다운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한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 때 이후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 따라 지음받은 존귀한 자라는 신분을 잊어버리고 자꾸 유혹아래 빠져들게 되었다.
이때 이후로, 사람은 자신의 관점이나 자신의 시각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 자신의 행위로 모든 것을 용납하고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죄를 지은 이후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자신이 생각하기에 수치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가리기 시작하였다.(3장 7절)
바로 여기서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바로 인간 중심적 사고 방식이 들어가게 된다. 선악과를 통해 자신의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 자신이 착한 행위를 하면 구원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생각들... -들이 도처에 사로잡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자신을 하나님 대신으로 놓게 되며 나중에 나아가 바벨탑 사건에서 그 극치를 맛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죄에 대해 문책하시지만, 그 죄를 이기고 해결할 수 있는 구원의 약속을 보여 주신다. 그것은 바로 아담과 하와가 직접 해 입은 무화과 나무잎의 행위로 나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아래 직접 피 흘림이 있는 구원으로 나아가는 가죽옷인 것이다.(21절)
하나님은 결국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주시고 자기를 제약하기로 결정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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