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훈훈한 소식이 인터넷에 올라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문근영이라는 탤런트가 개인 기부를 무려 8억 5천이나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수입의 상당히 많은 액수를 사회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내어 놓은 모습은 얼마나 도전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더군다나 나이도 어리신데, 그런 생각을 한 것을 보면 더욱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계 부를 차지하고 있는 비율을 나타낸 글을 볼 수 있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세계 부의 2/3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변함없이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고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것은 다 누구때문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죄악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부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기꺼이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누어 줘서 핍절한 사람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돈이 많다면 그것은 자신을 위해 쓰라고 돈을 많이 벌게 하셨겠는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돈을 벌게 해 주셨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라고 돈을 벌게 해 주셨을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 중에 이 말이 있습니다.
이 때를 위함이 아닌가?

내가 돈을 많이 번 것도 바로 이때를 위함이 아닌가?
가난한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 보내기 위해 돈을 많이 번게 아닌가?

내가 많이 배운 것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도록 하기 위한
이때를 위함이 아닌가?

이 때를 위함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요새 한국 현실을 보면
부자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세금으로 많이 뺐어간다고 아우성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사람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그리스도인 부자들은 그런 소리를 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재산이 많은 것도
가난한 사람을 위해 베풀라고 한 이 때를 위함이 아닙니까?

공동체에서도 보면
직장을 가지고 돈을 버는 사람들이
소그룹 모임에서 돈을 많이 써야 하는 것에 대해서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직장을 가지고 돈을 벌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를 위함이 아닙니까?

오늘날 경제를 살리자라고 외칩니다.
그것이 기도제목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항상 내세우는 논리가
가난한 사람들이 죽지 않느냐라고 말합니다.

경제를 살리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정의롭고 공의로운 가치관이 경제 질서에 자리잡는 것입니다.
부자들이 탈세를 해도 처벌받지 아니하고
기업을 정성스럽게 경영을 안해서 부실 기업을 만들어도
국민 세금으로 메우는 그런 논리가 존재하는 이상
이 나라에는 가능성이 없습니다.

오히려 아프더라도
하나님의 가치관이 경제 논리에 접목이 되고
부자들은 자신의 것들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누게 된다면
이 땅엔 소망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부를 나누게 된다면
경제가 조금 성장하지 않더라도
가난한 사람들도 같이 잘 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냥 경제를 살리자라고 말하는
논리만 존재하는 이상
또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을 위한 경제 논리에 이용만 당하고
계속 어려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봅니다.
맹목적으로 경제를 살려달라는 기도를 하지 말고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이 나라가 다시금 세워지는 계기가 되게
사회의 부가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져서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이상하게 모든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다는 것들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여 이 나라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리고 부를 독점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회개하여
자신의 부가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를 알 수 있게 해 주십시요.

AND

마틴 루터 킹 연설

Five score years ago, a great American, in whose symbolic shadow we stand signed the Emancipation Proclamation. 100여년 전, 우리가 그의 상징적 그림자 속에 거하는, 위대한 미국인은 노예 해방 선언에 서명했다

 This momentous decree came as a great beacon light of hope to millions of Negro slaves who had been seared in the flames of withering injustice. 이 중대한 법령은 사람을 쇠잔하게 하는 불공평의 불꽃 속에 지친 수백만의 흑인 노예들에게 커다란 희망의 신호 등불로 다가왔다.

It came as a joyous daybreak to end the long night of captivity.

그것은 속박의 오랜 밤을 몰아낼 즐거운 새벽으로 다가왔다.

But one hundred years later, we must face the tragic fact that the Negro is still not free.  하지만 100년이 지나서, 우리는 아직도 흑인들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극적 사실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One hundred years later, the life of the Negro is still sadly crippled by the manacles of segregation and the chains of discrimination.   100년이 지났어도, 흑인의 삶은 여전히 격리의 족쇄와 차별의 사슬로 인해 몹시 부자유스럽다

One hundred years later, the Negro is still languishing in the corners of American society and finds himself an exile in his own land. So we have come here today to dramatize an appalling condition. 100년이 지났어도, 흑인은 여전히 미국의 후미진 곳에서 고통받고 있으며, 비록 자신들의 땅에 있지만 마치 유배자인 것처럼 느끼고 있다. 오늘 우리는 이 끔찍한 상황을 생생히 나타내기 위해 이곳에 왔다

In a sense we have come to our nation's capital to cash a check.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는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 우리 나라의 수도에 왔다?

우리는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 우리나라 수도에 왔다

When the architects of our republic wrote the magnificent words of the Constitution and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they were signing a promissory note to which every American was to fall heir. This note was a promise that all men would be guaranteed the inalienable rights of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우리 공화국의 건국자들이 위대한 헌법과 독립 선언서를 작성하였을 때, 그들은 모든 미국인들이 물려 받게 될 확실한 조항에 사인하였다. 이 조항은 모든 사람은 빼앗을 수 없는 삶, 자유, 행복 추구권을 갖는다는 약속이었다

It is obvious today that America has defaulted on this promissory note insofar as her citizens of color are concerned. 오늘날, 미국은 유색 인종이 관여되어 있는 한은 이 확실한 조항을 불이행하여 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Instead of honoring this sacred obligation, America has given the Negro people a bad check which has come back marked "insufficient funds." 이 신성한 책임을 존중하기는 커녕, 미국은 흑인들에게 "자금 부족"이라고 쓰여져서 다시 돌아온 불량 수표를 나눠주었던 것이다.

But we refuse to believe that the bank of justice is bankrupt.

하지만 우리는 정의의 은행이 파산하였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We refuse to believe that there are insufficient funds in the great vaults of opportunity of this nation.

이 나라의 '기회'라는 커다란 금고에 재원이 부족하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So we have come to cash this check -- a check that will give us upon demand the riches of freedom and the security of justice.그래서 우리는 이 수표(청구만 하면, 풍족한 자유와 정의의 보호를 가져다줄 수표)를 환전하기 위해 온 것이다

We have also come to this hallowed spot to remind America of the fierce urgency of now. 또한 우리는 현재의 급박함을 미국에 상기시켜 주기 위하여 이 신성한 땅에 온 것이다

This is no time to engage in the luxury of cooling off or to take the tranquilizing drug of gradualism. 지금은 논쟁을 냉각시키기 위한 겉치레에 빠지거나 점진주의라는 안정제를 취할 때가 아닌 것이다 유유자적하는 쾌락에 빠지거나, 점진주의의 진정제를 복용할 시간이 없다.

Now is the time to rise from the dark and desolate valley of segregation to the sunlit path of racial justice. 격리의 어두컴컴하고 황폐한 계곡에서 빠져나와 인종적 정의의 양지로 올라갈 시간인 것이다. 지금은 어둠과 고립된 황량한 골짜기에서 인종간의 공정이라는 햇볕이 드는 길로 일어날 시간이다.

Now is the time to open the doors of opportunity to all of God's children. Now is the time to lift our nation from the quicksands of racial injustice to the solid rock of brotherhood.지금은 모든 신의 자식들에게 기회의 문을 열 시간이다.

조국을 인종적 불평등이라는 모래 구덩이에서 건져내어 형제라는 견고한 초석위에 세울 때이다.지금은 인종적 정의의 위험한 사태에서 형제애의 굳건한 암반으로 우리의 국가를 옮길 때이다.

It would be fatal for the nation to overlook the urgency of the moment and to underestimate the determination of the Negro. 국가가 지금의 급박함을 못본척 넘기고, 흑인의 결단을 과소평가한다면 치명적 실수를 하는 것이 될 것이다 국가가 위기의 순간을 간과하고, 흑인차별문제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치명적일 것이다.

This sweltering summer of the Negro's legitimate discontent will not pass until there is an invigorating autumn of freedom and equality.

흑인의 합법적인 불만이라는 이 무더운 여름은 자유와 평등의 기운나게 하는 가을이 오기 전까지는 물러가지 않을 것이다.흑인의 합법적인 불만이라는 더위에 지친 여름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고무적인 가을에 이르기 전에는 지나가지 않을것이다.

Nineteen sixty-three is not an end, but a beginning.

1963년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Those who hope that the Negro needed to blow off steam and will now be content will have a rude awakening if the nation returns to business as usual.

혈통을 져버리고 지금 만족해 하는 흑인들은 국가가 정상으로 될경우 그들의 무례한 행동에 대하여 깨우치기를 바란다

There will be neither rest nor tranquility in America until the Negro is granted his citizenship rights.  흑인이 시민권을 받기 전까지는 미국에서 우리의 휴식이나 평안함은 있을수 없다

The whirlwinds of revolt will continue to shake the foundations of our nation until the bright day of justice emerges.혁명의 회호리바람은 정의가 구현될때까지 국가의 기초를 흔들 것이다

But there is something that I must say to my people who stand on the warm threshold which leads into the palace of justice.정의의 궁전으로 인도하는 입구에 서잇는 나의 사랑하는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In the process of gaining our rightful place we must not be guilty of wrongful deeds.자유를 찾는데 잇어서 우리는 잘못된 행동이라는 죄책감을 느껴서는 안될것입니다

Let us not seek to satisfy our thirst for freedom by drinking from the cup of bitterness and hatred.  증오와 반감을 품으면서 우리의 자유에대한 갈증을 정당화 하려고 하지 맙시다

We must forever conduct our struggle on the high plane of dignity and discipline.

  위풍과 질서를 유지하면서 우리는 투쟁을 영원히 해야만 할것입니다 .

We must not allow our creative protest to degenerate into physical violence.

  우리의 창조적인 저항이 육체적인 소동으로 타락하지 않게 해야만 합니다


Again and again we must rise to the majestic heights of meeting physical force with soul force. 또다시 강조하건데 우리는 영혼의 힘과 육체적 힘을 겸비한 위풍당당한 모습이어야 합니다

The marvelous new militancy which has engulfed the Negro community must not lead us to distrust of all white people, for many of our white brothers, as evidenced by their presence here today, have come to realize that their destiny is tied up with our destiny and their freedom is inextricably bound to our freedom. We cannot walk alone.

 흑인사회에 몰아친 놀라운 새로운 투지가 모든 백인들(오늘 이자리에 참석한 것처럼 수많은 백인이 우리의 형제이지만)의 불신으로 이어지지 않게 해야하며 그들의 운명이 우리의 운명과 같이하며 그들의 자유가 우리의 자유와 별개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혼자 갈수 없습니다

And as we walk, we must make the pledge that we shall march ahead.

우리는 걸으면서 앞으로 힘차게 행진할것이라 다짐해야 합니다

We cannot turn back. There are those who are asking the devotees of civil rights, "When will you be satisfied?" We can never be satisfied as long as our bodies, heavy with the fatigue of travel, cannot gain lodging in the motels of the highways and the hotels of the cities.

우리은 되돌아 갈 수 없습니다

시민권을 위해 헌신적으로 뛰는사람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제쯤 만족을 하시겠습니까

  행군의 피로에 지친 무거운 몸이 고속도로의 모텔, 시내의 호텔에 안식하지 못하는한 우리는 결코 만족할수가 없는것 입니다

We cannot be satisfied as long as the Negro's basic mobility is from a smaller ghetto to a larger one.흑인들의 기본 생활권이 작은 케토(흑인 빈민가)에서 큰 케토인한 우리는 만족할수가 없습니다

We can never be satisfied as long as a Negro in Mississippi cannot vote and a Negro in New York believes he has nothing for which to vote.미시시피의 흑인들이 투표에 참여 할수 없고 뉴욕에 잇는 흑인들이 투표할 대상이 없는 한 결코 우리는 만족할수 없습니다

No, no, we are not satisfied, and we will not be satisfied until justice rolls down like waters and righteousness like a mighty stream.

아니죠, 아닙니다. 우리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정의가 물처럼 흘러 내리고 정직이 급류처럼 흘러 내릴때까지 만족하지 않을것입니다

I am not unmindful that some of you have come here out of great trials and tribulations. 여기에 온 많은사람들이 시련과 크나큰 고통 때문에 참여한것에 대하여 저는 관심을 두고 잇습니다

  Some of you have come fresh from narrow cells.  여러분중 일부는 좁은 감방으로 부터 밖으로 나왔습니다

  Some of you have come from areas where your quest for freedom left you battered by the storms of persecution and staggered by the winds of police brutality. 여러분중 일부는 자유에 대한 요구가 학대의 폭풍에의해 유린당하고 경찰들의 폭력에의해 비틀거렸던 것입니다

You have been the veterans of creative suffering. Continue to work with the faith that unearned suffering is redemptive.

창조적인 고통의 베테랑들이십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고통이 상환될수 잇다는 신념을 갖고 일해 나가십시오

Go back to Mississippi, go back to Alabama, go back to Georgia, go back to Louisiana, go back to the slums and ghettos of our northern cities, knowing that somehow this situation can and will be changed.

미시시피로 돌아가세요 알리바마로 돌아가세요. 조지아로 돌아 가십시오 여러분. 북쪽의 슬럼가, 게토로 돌아가세요. 이건 알고 가세요-어째건 이 상황은 바뀌어 질수 있습니다, 분명 바뀌어 집니다

Let us not wallow in the valley of despair. 절망의 계곡에서 뒹굴르지는 맙시다

I say to you today, my friends, that in spite of the difficulties and frustrations of the moment, I still have a dream.오늘 저는 여러분께 말씁드립니다. 순간의 어려움과 절망에도 불고하고 저는 아직 꿈을 가지고 잇습니다

It is a dream deeply rooted in the American dream.

아메리카드림에 깊은 뿌리를 박은 그런 꿈 말입니다

I have a dream that one day this nation will rise up and live out the true meaning of its creed: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언젠가 이 나라가 반듯이 일어나 사도신경의 진정한의미에 따라 살게 될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우리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진실이 스스로 증거가 할 것이다"

 I have a dream that one day on the red hills of Georgia the sons of former slaves and the sons of former slaveowners will be able to sit down together at a table of brotherhood.

언젠가 조지아의 붉은 언덕에 그 옛날의 노예의 자식들이, 그 옛날의 노예주인의 자식들이 형제애라는 테이블에 함께 앉을수 있다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 that one day even the state of Mississippi, a desert state, sweltering with the heat of injustice and oppression, will be transformed into an oasis of freedom and justice.

부정의 와 억압의 열로 찌는듯한 사막의 미시시피주 조차도 언제가는 정의와 자유의 오아시스로 바뀔것이라는 꿈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I have a dream that my four children will one day live in a nation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 나의 4명의 아이들이 언젠가는 그들의 피부색이 아니라 그들의 늘역에의하여 판단되는 나라에서 갈게 될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잇습니다

I have a dream today.(이건 해석 생략)

I have a dream that one day the state of Alabama, whose governor's lips are presently dripping with the words of interposition and nullification, will be transformed into a situation where little black boys and black girls will be able to join hands with little white boys and white girls and walk together as sisters and brothers.현재 파기와 간섭을 일삼는 주지사의 말이 많은 알리바마주가 작은 흑인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들이 백인 암자와 여자아이들과 손을 잡고 형제자매로 같이 걸을수있는 상황으로 바뀔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I have a dream today.

I have a dream that one day every valley shall be exalted, every hill and mountain shall be made low, the rough places will be made plain, and the crooked places will be made straight, and the glory of the Lord shall be revealed, and all flesh shall see it together.

저는 언젠가는 모든계곡들이 높아지고 모든 언덕과 산들이 낮아지며 울퉁불퉁한 곳이 평평해지며 주름접힌곳이 곧게 펴지고 신의 영광이 빛을 발하며 모든 인간이 같이 그것을 보게될것이라는 꿈이 잇습니다

 This is our hope. This is the faith with which I return to the South.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것이 나의 신념이며 그것을 가지고 저는 남쪽으로 가겠습니다

With this faith we will be able to hew out of the mountain of despair a stone of hope.  이렇한 신념을 가지고 우리는 절망의 산을 깍아서 희망의 반석을 만들것입니다

With this faith we will be able to transform the jangling discords of our nation into a beautiful symphony of brotherhood.이렇한 신념을 가지고 시끄러운 이나라의 불협화음을 형제애의 아름다운 교양곡으로 만들것입니다

With this faith we will be able to work together, to pray together, to struggle together, to go to jail together, to stand up for freedom together, knowing that we will be free one day.

이렇한 신념을 가지고 같이 일을 할수가 잇으며 같이 기도하고 같이 싸우고, 같이 감옥에 가며 자유를 위해 같이 일어설수 있는것입니다. 언젠가 자유를 얻을수 있는것을 알고 말입니다

This will be the day when all of God's children will be able to sing with a new meaning, "My country, 'tis of thee, sweet land of liberty, of thee I sing. Land where my fathers died, land of the pilgrim's pride, from every mountainside, let freedom ring."이날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나의 조국, 당신의 자유의 즐거운 땅 을 노래해, 나의 아버지가 묻힌 땅, 순례자의 긍지가 있는 땅, 모든 산에서 자유가 울리는 그런 땅 "이라는 새로운의미의 노래를 부를수 있을것 입니다.

And if America is to be a great nation this must become true. 미국이 위대한 국가가 되고자한다면 그것은 당연이 이루어 져야합니다

So let freedom ring from the prodigious hilltops of New Hampshire. 뉴 햄프셔의 거대한 언덕위에서 부터 자유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Let freedom ring from the mighty mountains of New York.

뉴욕의 거대한 산으로 부터 자유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Let freedom ring from the heightening Alleghenies of Pennsylvania!

펜실베니아의 높은 로키산맥으로 부터~

Let freedom ring from the snowcapped Rockies of Colorado!

콜로라도의 눈덮인 바위로바터 ~

Let freedom ring from the curvaceous peaks of California!

 캘리포니아의 아름다운 산봉우리로 부터~

But not only that; let freedom ring from Stone Mountain of Georgia!

조지아의 석산으로 부터는 제외 합시다

Let freedom ring from Lookout Mountain of Tennessee!

테네시의 루크아웃 산맥으로 부터~

Let freedom ring from every hill and every molehill of Mississippi. From every mountainside, let freedom ring. 미시시피의 모든 흙두덕이와 언덕으로 부터 자유의 종소리가 울려퍼지게 합시다. 모든 산에서 ~

When we let freedom ring, when we let it ring from every village and every hamlet, from every state and every city, we will be able to speed up that day when all of God's children, black men and white men, Jews and Gentiles, Protestants and Catholics, will be able to join hands and sing in the words of the old Negro spiritual, "Free at last! free at last! thank God Almighty, we are free at last!"

우리가 자유의 종이 울려 퍼지게 하면 우리가 모든 마을과 촌락, 모든 주,모든 도시에서 종이 울리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흑인과 백인이, 유태인과 이방인이, 신교도와 구교도가 손에 손을 잡고 그 옛날 흑인들의 정신이 깃든 노래를 할 날을 앞당길수 있게 됩니다   자유를 얻었다, 드디어 자유를 얻었어, 오. 전지전능한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결국 자유를 얻고야 말앗습니다

AND

본문 신명기 34장
34:1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34:2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34:3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34: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34: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34:6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34:7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34:8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34: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34: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34:11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화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34:12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


1. 날이 추워집니다. 추워지면 사람이 감정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외로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찬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무언가 우리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발라드가 유행하고, 슬픈 영화를 보면서 울먹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슬픈 이야기를 좀 해 보려고 합니다. 구약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나라를 읽고 고통 당할 때의 이야기도 슬프지만 오늘 모세의 마지막을 보내는 장면도 가장 슬픈 이야기 중의 하나입니다.

2. 모세의 일생
 모세의 일생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모세는 태어난지 석달만에 죽음을 피해서 갈대 상자에 담겨 나일강에 몸을 맡깁니다. 바로의 딸이 갈대상자를 보고 아기를 불쌍히 여겨 양자가 됩니다. 그렇게 바로의 궁에서 자라다가 자기 민족의 고통을 봅니다. 그 고통을 보고 분에 못 이겨 자기 민족을 괴롭히던 애굽 사람을 죽이고 도망하여 미디안 땅으로 갑니다. 거기서 결혼하고 처가살이를 오랫동안 하게 됩니다.
 나이가 팔십이 거의 다 될 때까지 어찌보면 지루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은 일상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나이 팔십이 되면 좀 쉬고 싶은 나이일 수도 있는데, 그 때부터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단 하루도 편할날이 없는 날들을 살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두려운 싸움을 싸우게 됩니다. 애굽의 노예 생활에 길들여져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불신하고 모세에 대해서 툭 하면 불만을 털어 놓고 심지어는 돌로 쳐 죽이려고 까지 합니다. 모세는 광야 생활에서 수많은 적군들 사이에서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야 합니다. 모세의 손에 어찌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운명이 달려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알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권면해야 했습니다. 모세가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삶을 살았겠습니까? 인생에서 자기 문제로 고민하며 사는 것도 쉽지 않은데, 다른 사람들, 자기 민족들 문제로 인해서 하루 하루가 가시 방석에 앉은 것과 같은 삶을 사는 것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 말씀을 잘 들었던 사람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툭하면 하나님에 대한 불만을 늘어 놓아서 모세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중보했습니까? 심지어 하나님에 대적하는 이스라엘 무리들을 위해 중보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 사람들을 살려 주십시요라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목표였던 오로지 한 가지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지루하고 길었던 싸움을 싸우게 됩니다.

3. 그런데 그 모세가 가나안 땅으로 못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인생의 목적을 가나안으로 향하고 일생을 그렇게 고생하고 살았는데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왜 못 들어 가게 되었습니까?
 
민수기 20장에 보면 그 이유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없어서 불평하는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는데, 모세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순간적으로 열받아서 내가 너희를 위해서 물을 내겠다라고 말하면서 반석을 지팡이로 칩니다.
20장 12절에 하나님은 모세를 보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하면서 가나안 땅으로 가지 못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모세가 뭘 그리 잘못한 게 있습니까? 모세는 하나님과 친구 사이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흥분해서 한 일은 어찌보면 모세의 전적인 잘못도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불순종하고 거역하려고 했기 때문에 모세가 잘못을 범하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였다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렸다고 모세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얼마나 청천벽력과 같은 선언입니까? 인생에서 그토록 바라고 목표로 고생하며 살았던 모세가 정작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면 그 느낌이 어떨까요?
정말 가슴 아플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제 가나안을 눈 앞에 두고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가나안 땅을 보여주며 모세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 전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의 뜻을 알고 평생 그분과 동행하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 놓고 하나님과 다시금 새로운 서약을 하게 합니다.
 이런 행동을 보게 되면 모세의 마음 속에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된 것을 이제는 받아들이고 이스라엘 백성들만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모세의 간절한 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느보산에 올라 자신은 비록 들어갈 수 없지만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죽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본문 34장 10절에서 12절에 보면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같은 사람은 없었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아시던 자다. 이 말이 어떻게 들립니까? 큰 여운으로 남고 하나님과 정말 그토록 가까웠던 자이구나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토록 모세와 가까우셨으며 친구처럼 지내셨으며, 아무도 하나님을 몰라 줄 때 하나님을 그토록 사랑했던 모세를 그냥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지 왜 생명을 거둬가실 수 밖에 없으셨을까요?
 모세는 가나안 땅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5절에 모세는 최후를 맞이하게 되고 msg에는 하나님이 직접 모세를 묻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했던 모세, 그 마음을 살폈던 모세를 하나님은 모세의 마지막 순간에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고 그를 직접 손으로 묻으셨습니다.
 하나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이 내용과 비슷하지는 않지만 심정을 느껴볼 수 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읍참마속이라는 사자성어와 관련된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읍참마속은 제갈량이 마속이라는 사람을 울면서 죽였다는 일화입니다. 마속이라는 사람을 제갈량은 자식처럼 사랑했고 마속은 제갈량을 아버지처럼 따랐습니다. 이 마속에게 제갈량은 중요한 곳을 잘 지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속이 경거망동해서 사려 깊게 행동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해서 그 곳을 지키지 못합니다. 이 마속은 제갈량에게 자기가 그 곳을 잘 지키지 못할 때는 목을 내 놓겠다고 말했습니다.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제갈량은 마속을 울면서 벨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면, 아무리 친해도 명령을 잘 준행해야 군대 기강이 살아 죽음의 격전지에서 잘 견디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율법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 중에 모세만큼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지 않고 산 사람이 혹시 있습니까? 그런데, 이 모세도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법 앞에서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나님이 정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리면 죽을 수 밖에 없고 영원히 멸망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모세도 빠져나갈 수 없는데, 우리는 얼마나 더 그렇겠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이 모세를 사랑하셨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바뀔 수 없습니다.
 모세는 율법의 상징입니다. 율법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저히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서는 율법 말고 다른 법을 세우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무슨 법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간음한 여인에 대한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간음한 여인이 잡혀 왔습니다.
율법에 의해서는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돌로 쳐서 죽임을 당할 일만 남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간음하고 대중 앞에서 사형 처분을 면제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 앞에 지금 선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 계시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이 간음한 여인을 그냥 보내셨습니다.
율법은 죄를 범하면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인을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은 변개치 않습니다. 그 여인은 죽어야 하는데, 그 여인을 보낸다면 그 처벌은 어떻게 해결 하는가입니다.  절대적으로 법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죽어야 할 사람을 그냥 보내라고 말하면 그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죄인을 보낸 사람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이 자신이 직접 그 죄를 담당하고 죽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5. 가장 친한 친구였던 모세도 하나님은 생명을 거둬가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장 자신을 잘 알고 그 뜻대로 했던 아들이신 예수도 십자가에 처벌받도록 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왜 그 희생을 감당했어야 하겠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심한 죄인이었습니까?
오히려 백성을 사랑했고 죄인들을 사랑했습니다.
그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구원받을 수 없음을 하나님이 심판하는 그 아픈 모습을 통해 보여주며 우리에게는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희생을 그냥 버리지 않습니까? 정말로 모세가 예수님이 그토록 원하셨던 하나님과 화해되며 생명의 길로 오라는 초청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지금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그토록 모세와 예수님이 그리고 초대교회의 숱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죽음에까지 이르면서도 걱정하며 예수를 믿으라고 그 길만이 살 길이라고 외치며 사라져 갔던 것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지난 수요 기도회 때 우리 가운데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정말 눈물날만큼 가슴 아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정말 사랑합니까? 자기의 일에 정신 팔려서, 남자 친구와 여자친구에 정신 팔려서 하나님은 계속 뒷전에 계시지는 않습니까?

6.  장신대를 은퇴하신 주선애 교수님이 계십니다. 나이가 85세입니다. 그 분이 여성신학생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신 것을 들었는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국 기독교 초기에 여성들은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많은 사회적 차별 속에서도 예수님을 향한 목마름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삶을 살았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 현실 속에 여성들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이 땅을 품고 기도했던 그 모습들이 사라져간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면서 안타까워 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곁에서 끝까지 사랑했던 사람들은 여성들이었습니다. 왜냐면 이스라엘 사회적 차별 속에서 예수님은 여성들을 자유롭게 해 주시고, 그들의 마음을 만지셨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이 다 주를 떠나도 여자들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들이 다 비겁하게 주를 버렸어도 교회는 여자들이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오히려 여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세상으로 떠나고 기도하지 않고 자신들의 일에만 관심을 가지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한국 사회에 그만큼 소망이 없음을 보여주고 하나님을 사랑했던 최후의 보루였던 여성들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친구처럼 사랑했던 모세를 율법으로는 도저히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없음을 아시고 죽이시고 손으로 친히 묻으셨던 하나님, 사랑했던 아들이었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기까지 그 아들까지 묻으셨던 하나님.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그 아픔에 반응해야겠습니까?
 그토록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일, 모세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고 그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기타 )
관련 성경구절들
출33:11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민12:6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민12: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민12: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히3:5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히3: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1. 히브리서에 보면 모세가 예수님을 바라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그냥 하나님께 맡기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2. 시므온도 늙은 상태에서 예수를 기다리고 아기 예수를 보면서 이제는 눈을 감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토록 보기 원하던 예수님.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열심히 예수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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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daily life 2008. 10. 25. 22:47
인생은 갈대상자 속에 놓인 모세가 흘러 흘러 이집트 궁전으로 갔듯이
처음에는 이집트의 생활로 흘러갈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더 흘러 흘러 성령의 갈대상자에 실려 가나안으로 향한다.
모세가 바로의 궁을 떠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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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1:1-10 중에서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1:2 우리가 너희 모두를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1: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1: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1: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1. 복음이 이기고 있는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당혹했던 것은 복음이 이기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것입니다. 나의 삶 속에 과연 복음이 이기고 있는 것인가? 말씀이 이기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이기고 있는가?

오늘날 많은 설교가 들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라면서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듣습니까? 그런데 그 많은 말씀들이 우리의 삶 가운데 얼마나 뿌리 내리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 순간은 말씀에 은혜받고 감격하다가도 또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삶은 똑같은 모습을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설교가 좋은 것 같다가도 설교자가 자신이 한 설교와 상관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는 것을 알게되면 그 설교가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럴 때 참 허무합니다. 그럼 그 사람이 여태까지 했던 그 설교는 무엇인가?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말씀을 붙들고 일생을 사는 사람인데, 그 사람에게조차 말씀이 영향력 없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물론, 여기서 저도 제외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의 삶 속에 복음이 이기고 있습니까? 복음이 능력이 있습니까? 우리 청년부는 어떻습니까? 과연 복음이 이기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혹시 어떤 교회가 예배가 좋다 숫자가 늘어난다 이런 말 말고 복음이 이기고 있는 교회이다.라는 소문을 혹시 들어본 일이 있습니까? 그 교회는 말씀이 성도들의 삶을 변화시켜서 성도들이 험난한 세상 가운데서 말씀으로 능히 이기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교회야!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2. 이상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고 하나님은 모든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신데,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이 이겼다는 소문을 잘 듣고 있지 못합니다. 한국 사회를 온통 둘러봐도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이기고 세상을 향해 담대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잘 듣지 못합니다. 그런 소식을 듣는 것이 오히려 어색한 시대가 되어 가고 있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나오는 데살로니가 전서는 오히려 복음이 이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6절에 보면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어 그 도시와 주변 도시 뿐 아니라 세상을 향해 믿음의 소문이 퍼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환난 가운데 저 교회는 참 신기한 교회야. 복음이 이기고 있어. 그런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교회를 발견하게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기독교에 대해서 공격하고 환난과 박해가 많아지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 그런 놀라운 일이 발생하고 사람들이 온통 그 교회에 대해서 참 신기하다.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교인들의 삶이 온통 복음으로 변화되고 있어. 이렇게 어려운 세상 속에서, 환란 속에서.

 

3. 그렇다면 과연 데살로니가 교회 사람들이 환난 중에서도 복음으로 승리하고 있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환난 속에서도 복음이 오히려 세상을 압도하고 승리를 선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기독인인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물음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5절에 보면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복음이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것이 단순히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을 체험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우리 가운데 큰 확신으로 다가오는 말씀을 체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이 우리 마음 속에 다가와서 눈물 흘리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남아서 우리의 삶을 강력하게 인도하는 경우가 있으십니까?

신앙 생활을 하면서 그런 체험을 해 보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냥 말씀 자체에만 머물러 있고 우리 삶 가운데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여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경험을 못 해본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고, 세상을 이길 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뿐만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달되도록 역할을 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5절 후반부에 보면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라는 사람들이 데살로니가교회 사람들과 같이 지내면서 그들이 복음이라는 것이 단순히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이 있는 것이구나라는 것을 보면서 이들의 삶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GNB는 5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당신들에게 전했는데, 말 뿐만 아니라 능력과 성령으로 또한 그것이 진리라는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전했다. 당신들은 안다. 우리가 당신들과 함께 있었을 때 어떻게 살았는지. 이것은 모두 당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한 일이었다.

6절은 바로 이렇게 시작합니다.

당신들은 우리와 예수님을 본받았고 심지어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그 말씀을 성령으로부터 오는 기쁨으로 받았다.

즉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실제로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과 같이 살면서 삶으로 말씀이 얼마나 성령의 능력이 있는지, 완전한 확신을 주는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성도들은 그들을 본받으려고 했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4. 제 믿음의 길을 돌아보니까 저도 믿음의 본을 보여주는 사람, 믿음의 본이라는 것이 그냥 단순히 지적으로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삶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그 말씀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능력있게 이끌고 가는 지를 보여줬던 사람에 의해 하나님 말씀이 이런 것이구나 하나님은 살아계시구나 이것에 내가 모든 것을 걸 만하구나라는 것을 느낀 것 같습니다.

즉, 복음이라는 것은 삶을 붙들고 변화시키며 담대하게 설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있을 때, 저는 거기에 있던 저의 리더들을 보았습니다. 많은 어려움이 다가와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을 붙들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 말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돈이 없어도 말씀을 붙들며 말씀에 감격하고 말씀으로 이겨낸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또한, 삶에 있어서 잘못을 저지를 경우, 죄를 지을 경우 예를 들면, 거짓말을 하지는 않지만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 하면 즉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을 만났다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말씀들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켰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들의 삶을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분들이 하신 말씀이 저에게 사실로 다가왔습니다.

보십시오. 성경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교 진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거짓말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거짓말 하는 사람들을 싫어하시며 벌하십니다. 그런데, 바울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난 것을 거짓말 할 것이며, 많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며 목숨까지 바치던 사람들이 어떻게 거짓말을 할 것이며, 그들을 옆에서 지켜보던 데살로니가교회 사람들이 삶에서 향기가 드러나던 그들의 메시지를 어떻게 거짓말일 것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로 당당하게 서며,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있게 그들에게 다가오며 그들은 바울등이 전한 메시지를 확신 가운데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환난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복음이 주는 능력 가운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5. 저는 개인적인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공동체에 말씀이 능력이 되어 삶 가운데 붙들고 있는 것을 체험한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 사람들을 보면서 도전을 받아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공동체가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의 소문이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그 시작은 단순한 데서 비롯됩니다. 말씀의 능력이 어떤 지를 체험한 사람에게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앙 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이 어떤지를 체험하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직분을 갖지 않으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직분을 갖고 안 갖고가 아니라, 이 공동체에 머물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렇다라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실 분들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살 때 내 삶이 이렇게 변한다라는 것을 그냥 사람들이 보게 해 주면 우리들의 믿음이 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삶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땅 가운데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있을 때, 그것이 하나의 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것이다라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거친 세상 속에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사단의 그 유혹속에서도 예수님은 사람은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 말씀으로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자녀로 당당하게 세상 가운데 나간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지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신뢰속에 제자들도 세상에 나가서 자신들의 삶이 예수님에 의해, 성령에 의해 송두리째 바꾸어지는 놀라운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의 제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6.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저에게 말씀이 이렇게 능력이 있는 것이구나를 삶으로 보여 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그걸 알게 되고 그 사람의 삶도 그렇게 되었을까? 아마 그 사람에게 그런 영향력을 전해 준 어떤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도 또 어떤 사람이 그랬을 것입니다. 자꾸 위로 올라가면 그 맨 위는 누구이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는 복음이 살아 있는 능력이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삶에서 같이 보며 배웠던 사람들로부터 시작되는 흐름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연결되어 옵니다. 여러분들은 복음이 능력임을 삶에서 나타나는 그 라인에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믿음의 족보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실제로 살았고 믿음으로 능력 가운데 세상을 이겼던 사람들의 라인입니다. 이 믿음의 라인을 아브라함의 라인이라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라인이라고 합니다.

 

7. 동막교회 청년부 속에서 저는 그런 사람들을 몇몇 보았습니다. 삶에서 어려움들이 끊임없이 밀려오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말씀을 부여잡고 절대 포기하지 않으며 그 말씀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세상을 이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단 하나의 부분이라도 말씀이 이렇게 내 삶을 변화시키고 내가 말씀에 의해 이런 부분에서 승리하고 있습니다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환난 속에서도 말씀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런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셨다면, 주님께 간구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저의 삶의 한 부분이라도 변화시키는 것을 체험하길 원합니다. 여러분이 그 승리의 체험을 할 때 여러분의 신앙은 죽은 신앙이 아니라, 살아서 역사하고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다는 것을 여러분이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말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은 세상을 이깁니다. 말씀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들이며세상을 이긴 믿음이 스스로 세상에 퍼지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냅니다. 전도는 믿음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믿음이 승리하는 것을 보여주지 못한 사람이 하는 어떤 이야기도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능력있다는 분임을 증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공부하는 과정에 있어서, 그냥 그 시간을 땜빵 식으로 보낼 것이 아니라 절실히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이 말씀을 통해서 말씀이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능력으로 다가오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그 능력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을 가지시고 주님을 기대하십시오. 우리 삶 가운데 놀라운 말씀의 능력을 보여주실 것이며, 그 능력을 체험할 때 우리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깁니다. 우리는 그런 믿음의 사람으로 부름받았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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