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중의 하나는 공의의 하나님이고 정의의 하나님이신 분이 어째서 악이 창연한데도 내버려두시느냐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악의 발생 문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루겠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정벌하면서 하나님이 그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악을 행합니다.

사사기 2장 2절에 보면
2:2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 주민과 언약을 맺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행동은 악에 해당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사사기 2장 23절에 보면 다른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2:23 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그들을 속히 쫓아 내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 주지 아니하셨더라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신 것이 하나님이 하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 민족들을 쫓아내라고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쫓아내지 않은 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은 전능의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지 않는 악을 행하였지만, 하나님은 능히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방 민족들을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2장 22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를 지켜 행하나를 보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악에 대한 행동은 처벌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악을 바로 처벌하실 수도 있고, 선을 위한 하나의 교훈의 목적으로 도구로 사용한 다음에 처벌하실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사단을 이용하시는 모습도 우리는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단은 악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처벌받게 운명지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사단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영원히 처벌 받아지는 운명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처벌하실 수도 있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또는 다른 목적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는 권리도 있으시고 그 때문에 처벌을 시행하는 순간을 유예하실 수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악은 처벌받으니 정의는 훼손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능하심도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 주변에 악인이 오랫동안 존재하는 경우도 있고,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을 이유가 있다면 바로 처벌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이 발생한 곳을 선으로 회복시키길 원하십니다.
인간이 악을 범하고 인간이 망쳐 놓은 곳을 하나님은 회복시키시길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셨다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철저히 죄와 악은 하나님 아닌 것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런면에서 쓰나미나 이라크 전쟁 같은 것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쓰나미를 일으키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국을 통해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절대 그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의 죄악이 이런 사건들의 단초를 제공하게 됩니다.
쓰나미라는 자연재해도 인간이 환경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서 자연적 질서에 의해 발생하게 됩니다.
이라크 전쟁도 사람의 탐욕 등의 이유로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악의 발생을 안타까워 하시고 그것을 선으로 바꾸길 원하십니다.

이런 논리에서 해석해야지
그 곳에 지금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나니까 그것의 원인조차 하나님이 일으키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 엉성한 논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죄를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심판은 최후의 하나님 보좌 앞에서의 심판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가 바로 은혜의 시대인 것입니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이라 심판이 바로 임할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AND

은혜의 성찬

 

고린도전서 10:16-17 공동번역

10:16 우리가 감사를 드리면서 그 축복의 잔을 마시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마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우리가 그 빵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0:17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최고의 식탁은 무엇이었습니까? 저도 이 질문에 생각해 보면서 나의 삶에 있어서 최고의 식사 자리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고등학교 교사가 되고 나서 저는 색다른 경험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학부모들과의 식사자리였습니다. 사회 초년생이었던 저는 모든 것이 새로운 자리였습니다. 그 때 쇠고기를 구워먹었는데, 아마 굉장히 좋았던 쇠고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입에서 살살 녹는 쇠고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자리를 최고로 칠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최고의 식사자리였다고 기억되는 것은 어머님이 차려주신 식사자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지난주에 사정이 있어서 고향집에 내려가게 되었는데, 고향에 가면 참 좋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손 하나 움직이지 않아도 어머님께서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정성들여 준비하시고 온갖 과일들과 맛있는 것들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동안 저에게 주어진 자유로운 시간을 만끽하며 tv도 보고 있고, 책도 읽고 식사가 차려지면 우와 하는 탄성과 함께 이 모든 음식을 먹습니다. 먹고 나면 설거지도 어머님이 다 해 주시니 그야말로 기분 최고인 식탁입니다.

오늘 본문에 성찬에 대해서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를 드리면서 그 축복의 잔을 마시는 것은, 빵을 떼는 것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잡히시기 바로 전에 제자들에게 베푸신 그 성찬은 참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 교회에서도 일년에 여러 번 성찬식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잘 모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찬은 하나님 은혜의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성찬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절차를 거쳐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임재하여 계신 지성소까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대제사장이 1년에 한 차례(횟수로는 4번정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정결케 하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는데, 성경에는 없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식서인 <장로들의 유전> <미쉬나>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과 관련하여 이런 규칙이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되고 첫 번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지성소 법칙을 몰라서 죽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발목에 끈을 매고 들어 가야 합니다. 혹시 죽으면 잡아 당겼습니다.”

만약 대제사장이 자기를 정결하게 하지 못한 상태에서 또는 하나님의 절차가 아닌 다른 절차를 따라 들어갔을 땐 죽게 됩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선 엄청난 정도의 거룩함과 성결함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출애굽기 19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신다고 하셨을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3일동안 정결케 한 다음에 비로소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대한 간접적인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보았지만, 제사장들과 기타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경계를 정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성결하지 않아서 하나님을 보았다가 존재가 멸망당하는 위험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기드온과 같은 여러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자를 만날 때 내가 죽게 되었다고 걱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약을 읽으면서 넘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왜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에서 보이는 하나님의 이미지와 다른가? 구약에서는 율법을 주시면서 지킬 것을 말씀하시는 어찌보면 하나님은 두렵고 공포의 대상인데,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으로 나온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을 과감하게 버리고 신약에서 나오는 참 사랑의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사에서 이단의 한 형태로 나온 주장이기도 하며 오늘날에도 여러 이단들이 이런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율법에는주어진 여러 이유가 있지만 다음의 것을 통해 율법을 주신 이유가 은혜와 배치되지 않음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먼저 은혜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하면서 모세를 통해 율법이 주어집니다. 참 이해가 안 되는 사건입니다. 율법보다 먼저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데, 왜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는가에 대한 부분이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왜 필요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다음의 것이 하나의 큰 이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처음부터 하나님이 인자하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인생을 가장 잘 사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따르면 얼마나 좋을까요?

솔로몬은 젊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것의 근본이고 인생의 의미라고 생각하며 잠언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자기가 아는 대로 그대로 실천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전도서 2장 3절에는 솔로몬이 인생을 헛되게 보낸 이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2:3 내가 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내가 어떻게 하여야 천하의 인생들이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를 알아볼 때까지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하여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간구하였고 하나님이 지혜를 줍니다. 그러나, 인생에 대해서 궁금함이 많았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일까? 이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을까? 더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없을까 하고 자신을 술로 즐겨보기도 하고 부로 즐겨보기도 하고 각종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기쁘게 한다는 것으로 자신을 채워보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늘그막에 이 모든 것이 헛되다고 고백하는 모습을 전도서에 남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전도서 12장 1절에

12: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늙어서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겠다고 결론 내리는 것보다 내가 모든 것을 다 경험해 봤으니 처음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지, 인생에 참된 의미를 주는지를 깨달으라고 솔로몬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고 그 생활이 최고임을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선택을 능히 압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거부했습니다. 그것이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살 때 그것이 진짜 기쁨을 주는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한국의 남자들은 나이가 되면 국방의 의무를 지게 됩니다. 신기한 것은 군대에 가기 전까지는 부모님의 사랑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군대에 가기전이나 갔다 온 후나 부모님의 사랑은 변함없을 것입니다. 변함없이 자식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차려 주시고 정성들여 자식들을 섬겨 주셨을 것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부모님께서 나이가 들어도 변함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군대에 가기 전까지 부모님의 사랑을 모르고 군대에 가서 정말 고생하며 인간적인 대접을 잘 못 받고 명령으로 사는 군대라는 조직사회에서 부모님을 생각해 보니 얼마나 헌신적이었고 사랑이 많으셨는지를 느끼게 되면서 부모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많은 젊은 청년들이 결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대하면 부모님에게 잘해야 겠다 이런 것입니다. 떠나봐야 받았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절실하게 깨닫고 다시금 결단하게 됩니다.

이제는 율법이 왜 주어졌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자신의 힘으로 인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그것이 아니었음을 가르쳐주는 도구로, 또한 하나님이 그냥 사랑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가르쳐주는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로마서 5: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기독교의 은혜를 가장 잘 표현한 비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탕자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생각하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떠나 탕자가 방황하다가 탕자가 돌아왔을 때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먼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탕자가 떠나도록 재산을 떼어 줬다는 데 있습니다. 아버지는 능히 자신의 재산을 당장 주지 않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 안 듣는 자식에게 앞으로 영원토록 재산을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재산을 떼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식을 보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자식이 떠나봤을 때 아버지의 사랑을 더욱더 알 수 있기 때문이며, 사랑은 강제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의 어머니께서는 저의 잘못된 점을 고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한 가지 방법은 제가 잘못했을 때 바로 벌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참 많이 맞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어쩔 때는 제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알면서도 한동안 내버려 두신 적이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가선 아주 따끔하게 혼이 났습니다. 왜 시간을 두고 벌을 주셨을까요? 그것은 잘못된 길로 가는 과정에서 교훈을 얻을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과정을 참으시고 벌을 보류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의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도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바로 주어졌을 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율법을 통해 인간이 처절하게 자신이 한계를 가지고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교훈으로 삼기 위해 구약의 그 오랜 기간들을 하나님은 끈기를 갖고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절실하게 느낄 기간을 찾으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고 아주 오랜 기간이 흘렀습니다. 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될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시간 이후에 바로 은혜의 결정적인 순간이 나타나게 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일방적으로 베풀어졌지만, 인간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살겠다고 에덴을 뛰쳐나갔고, 또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도 완전함으로 깨끗할 수 있다는 착각을 가지고 힘들게 살았던 시간들 속에 그것이 인간의 총체적인 실패임이 드러났을 때, 바로 은혜의 완전함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했을 때 그리고 하나님이 세워두신 율법의 원칙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다 지키고 나아가려고 했을 때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그 한계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 모든 한계를 깨뜨리시고 예수님의 식탁으로 사람들을 조건 없이 초대하였고 어떤 노력도 없이 예수님이 베푸신 그 정성스런 식탁아래서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식탁에 참여한 사람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세리 삭개오도 율법으로는 절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지만, 예수님이 뽕나무에서 내려오라고 내가 너의 집에서 같이 식탁을 할 것이라고 예수님은 은혜의 자리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과부들과 함께 하셨고, 가난한 자들, 창녀들과도 같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짐들을 대신 지시고 용서하시고 그들과 식탁을 같이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식탁이었던 최후의 만찬의 순간으로 돌아가보려고 합니다. 흔히, 최후의 만찬 그 자체만 보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요한복음을 보면 우리는 그 모든 과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최후의 만찬이 나오는 부분입니다.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가 된 줄 아시고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시면서 바로 행하셨던 것이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시면서 최후의 만찬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위해 준비하신 것들을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끝까지 이 사람들을 사랑하겠다. 마지막으로 발을 씻겨 주고 떡과 포도주를 통해 나의 사랑의 의미를 가르쳐주고 그리고 나서 14장에는 그냥 이 사람들을 세상에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보내어 항상 같이 있게 하겠다. 얼마나 따뜻합니까? 저는 이 식탁을 생각할 때마다 어머니의 식탁이 떠오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처음과 끝이 되신 하나님 항상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태초 전 부터도 우리를 향한 이 예수님의 식탁 준비와 같은 사랑을 하셨으며 지금도 동일하십니다. 단지, 우리들이 그 사랑을 거절하고 이해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있다고 그 품을 떠나갔을 뿐입니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이나 신약에서의 하나님이나 같은 분이시고 태초부터 우리를 향한 은혜를 표현하신 분이셨으며, 율법이라는 과정을 지나는 동안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계획하신 분이셨습니다.

[히13:8]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불순종하므로 그들이 40년동안 방황할 때도 하나님은 그 벌을 내리시고 하늘 위에서 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그 벌을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계시며 광야를 지나시는 모습을 신명기 2장 7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시기로

 

보통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벌을 주는 경우 교사는 그 벌을 같이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그 벌로 40년간을 광야를 헤매게 하셨지만, 하나님은 저 높은 보좌에 계시며 40년 지난 후에 내가 다시 함께 가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 40년간의 광야의 방황을 같이 담당하셨습니다. 이런 모습은 신약에서의 예수님의 모습과 오버랩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인간들이 자신의 죄악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있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육체로 이 땅 가운데 자신이 직접 그 모든 형벌을 감당하셨습니다.

어찌하여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르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구원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돌아오기를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분명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오래 참으시는 그 사랑이 공의와 정의보다 더 크므로 우리를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우리에겐 이 놀라운 식탁으로 하나님의 초대가 있습니다. 태초부터 계획되었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품에 안겨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그 사랑과 은혜의 떡과 포도주를 받아 마시며 감사함 가운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식탁을 베풀어 주신 후,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을 인간들에게 하셨습니다. 죽음으로 사랑을 세상 끝날까지 표현하시고 그 사랑을 알기를 마지막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얼마나 더 하나님이 무엇을 하셔야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지 아니하고 받아들이게 될까요?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을 통해서 마지막까지 사랑을 표현하셨는데 아직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방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찬식에서는 어떤 사회적 지위나 성별이나 자신의 상태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떡과 포도주가 나누어집니다. 얼마나 감격스런 은혜의 식탁입니까?

이 은혜의 식탁, 사랑의 식탁, 인간을 향한 그 하나님의 사랑의 준비를 기억하고 사랑의 준비 후에 십자가 지신 그 끝없는 사랑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그 성찬의 식탁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하나님의 복이 한량없이 임하는 놀라운 하나님과의 두려움 없는 교제의 자리인 것입니다. 기쁨의 자리인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와 하나님과의 어떤 장막도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자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찬을 받을 때마다 예수님의 그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함으로 임해야 할 것이고, 우리 삶 가운데도 놀라운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승천하시기전에 제자들에게 베풀어 주신 또 하나의 식탁을 살펴보며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새번역 성경에 보면 요한복음 21:9-13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21:9 그들이 땅에 올라와서 보니, 숯불도 피워 놓았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21:1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 오너라."

21:11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가서 그물을 땅으로 끌어내렸다. 그물 안에는 큰 고기가 그렇게 많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는 않았다.

21:12 예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서 아무도 감히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주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21:13 예수께서 가까이 와서 빵을 들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또 생선도 주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뿔뿔이 흩어져 자신의 생업으로 돌아가 어부였던 사람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다가 못 잡고 날이 밝았을 때 예수님은 나타나셔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정말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그제서야 주님인 줄 알아본 제자들이 육지로 올라가 보니 예수님께서 숯불을 피워 놓으시고 생선과 빵을 구워 놓고 아침을 준비해 놓은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빵과 생선을 집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식탁입니까? 예수님이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언제나 은혜로 섬겨주시는 어머니와 같이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그 정성과 섬김의 자리, 이 자리로 예수님은 여러분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은혜의 식탁에 아무런 조건없이 감사함으로 참여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그냥 일방적으로 베풀어두신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을 사랑의 식탁으로 초대하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시며 사랑한다 말씀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지금 주님 앞에 기도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평생 하나님을 의지하며 경외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생명의 길이고 풍성함의 길인지를 깊게 알기를 원합니다. 방황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평생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잠겨서 그 사랑을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는 자로, 주님의 아무런 조건없이 베풀어주시는 그 사랑과 은혜의 식탁에 같이 참여할 수 있는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주십시오.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AND

말씀을 통해 생각하는 삶

고린도전서 10장 15절

나는 지혜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어느 집회에 한 모임에 아멘녀가 있었습니다. 신일 형제가 절 보고 된장남이라고 부르듯이 성별에 따라 차별하는 말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아멘녀는 집회에서 목사님이 설교 할 때마다 아멘 아멘을 말합니다. 뭐 다 같이 아멘이라는 말로 화답할 때는 괜찮지만 목사님이 뭐 한 마디 꺼내면 다 아멘합니다. 정말 귀에 거슬려서 예배에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속으로 누가 입에 지퍼를 닫을 수는 없을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심지어, 틀린 이야기를 해도 아멘, 농담을 해도 아멘.

 

 국어사전에는 아멘이라는 뜻을 기도나 찬송 또는 설교 끝에 그 내용에 동의하거나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듣고 자기 머릿속에 동의가 된다고 생각했을 때 그 말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을 때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교인들의 문제점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생각 없이 아멘을 남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 없이 아멘 아멘을 남발하니까 삶에서 변화가 없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오해 중의 하나는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믿으라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러려면 무엇 때문에 이성을 주셨습니까?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공중의 나는 새를, 들의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셨습니까? 오해 중의 하나는 예수님은 논리적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굉장히 논리적이셨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마가복음 3:22-27절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예수님보고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것이다라고 비난합니다. 예수님은 거기에 어떻게 답변하셨습니까?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나라가 분쟁하면 나라는 망하게 되어 있다라는 논리로 공격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냉철한 지성과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율법사 하나가 예수님에게 다가와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이냐고 물어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두 가지로 요약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변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깊이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형식에 얽매여 있는 모습을 보면서 진정한 하나님의 뜻은 마음과 같이 가는 것이라고 말하셨습니다. 얼마나 생각이 많으신 분이셨겠습니까? 우리 안에도 이런 태도가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묻고 또 물어도 귀한 질문입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는 이성적이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정말 이성적인데 비해 기독교는 이성적이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같이 이성을 조금이라도 사용하는 걸 싫어했던 세대가 또 있었을까요? 다들 경험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대학을 봐도 그렇습니다. 철학과 물리학이라는 과목이 인기가 있습니까? 신대원에서도 조직신학이라는 변증학이 별로 인기가 없고 다들 실천을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것에 관심이 있으며 경험하는 것에 초점이 많습니다.

 

  SBS 신의 길, 인간의 길이라는 다큐에서 유럽의 많은 교회들이 술집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을 비추면서 한 사람과 인터뷰 했습니다. 왜 교회를 안다니냐? 그런데 그 청년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이성적이지 않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뭔가 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기쁨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유럽 청년들이 불교나 샤머니즘에 관심이 많은데, 그 이유는 자기가 무엇을 이룰 수 있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 반박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주장을 하려면 자기가 정말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의 기쁨을 누려 본 다음에 자기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 때의 기쁨과 비교해야 합니다. 전자를 경험해 보지도 못하면서 후자를 이야기하는 것은 모순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기쁨을 추구하다가 하나님을 아는 기쁨이 충만하여져서 세상의 기쁨이 아무것도 아니었노라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널리고 널렸습니다. 왜 그런 것들은 살펴보지 않습니까? 다 생각 없이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쪽만 생각해 보고 다른 쪽은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이성은 결단과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삶에서 변화를 일으킨 것들이 있다면 어떤 과정을 통해 변화가 이루어졌습니까? 어떤 것에 도전 받아서 나의 삶을 생각해 보니 그것을 적용하지 않고서는 나의 삶이 바뀔 수 없겠구나라는 철저한 인식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삶의 변화가 없는 사람은 이성을 쓰지 않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받고도 단지 감정적으로만 반응하고 정말 그것이 나한테 필요함을 뼈저리게 인식하여 이렇게 해야 겠다라는 결심으로 나가는 이성을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의지를 일으키는 것은 이성의 명령에 의해서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읽을 때 왜 그런 말씀이 있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설교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아멘 하지 마시고, 그 말씀이 정말 하나님의 뜻이 담긴 말씀인지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교회에서 상처 받았다고 하는 분들 중 많은 분들이 이성을 사용하지 않아서 넘어졌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들어서 그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면 받아들이면 됩니다. 이걸 못하니 상처받습니다. 무너집니다. 쓴 뿌리가 생깁니다.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 한 말이더라도 분별할 수 있길 바랍니다. 이것을 분별하기 위해선 여러분은 말씀을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참 신기한 현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선교 단체에서 훈련 받을 때는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리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겠는데, 훈련이 끝난 다음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음성이 잘 안 들린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왜 옛날 초대 교회 시절에는 병자들이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역사가 많이 일어났는데, 오늘날에는 조금밖에 안 일어나느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하나님의 음성이 안 들린다고 뜻을 모르겠다고 방황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럼 다음과 같은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면서 광야에서 오랫동안 생활 했습니다. 먹을 물도 없고 양식도 없었습니다. 급하게 나오느라 무슨 양식을 많이 준비해 나왔겠습니까?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출애굽 했습니다. 그럼 먹을 것과 물은 어디서 구합니까? 아무것도 없는 광야 생활을 했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먹을 것도 마실 것도 구할 수 없습니다. 유일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또는 전쟁을 해서 전리품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공급하는 방법을 주된 방법으로 채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공급자 되심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5:12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5:12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만나가 그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 해에 땅에서 나는 소출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병 고침의 기적들이 가장 많이 나타나는 곳은 어딘지 아십니까? 병원이 없는 곳입니다. 치료 수단이 없는 곳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재정적인 공급이 가장 잘 채워지는 곳은 어딘지 아십니까? 경제적인 것을 도무지 채움 받을 수 없는 곳입니다. 방글라데시에 갔더니 제자훈련 학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은 무슬림 국가라서 도무지 크리스쳔들에게 경제적 뒷받침을 해 줄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놀랍도록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가장 하나님의 음성이 명확하게 들려지는 곳은 어디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쉽게 접할 수 없고 위험한 지역에서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말씀하실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현실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병에 걸렸을 때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이 많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음성이 안 들린다고 말하십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기록해 놓은 책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생각하고 실천하면 왜 내 삶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고 변화되지 않겠습니까?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하나님이 사용해서 먹으라라고 말하는데 아직도 만나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이 땅의 소출물에는 관심이 없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 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 알 수 없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생각하여 보라, 말씀을 통해 이 분이 진정한 구원자가 아닌가 생각하여 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이 예언한 분이 바로 이 분이다라고 여러 증거를 대며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메시야는 아직 안 오셨어라고 말하며 다른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이와 비슷한 현상이 우리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는 그 말씀을 제외시켜 놓고 어떤 다른 말씀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바울도 이 세상에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그 말씀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상고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7: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날마다 성경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로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헬라인들의 관심은 지적인 곳에 있었습니다. 남자도 그 당시에는 지적 교육을 받은 대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해마십시오. 믿음은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오히려 이성을 사용하면 사용할 수록 우리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성 사용의 최종 이유는 인간의 한계를 깨닫는데 있습니다. 즉, 인간으로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잘난체를 하는 것이지, 진짜 이성적으로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파스칼도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가장 종착점은 이성의 한계를 느끼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정말 신이 존재하고 신이 가르쳐준 종교라면 다음과 같은 것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신이 완전해야 하며 신의 길, 신이 제시해 주는 길 또한 완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신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신이 아니겠지요? 인간이 범하는 범죄적인 것들을 신이 행한다면 신이겠습니까? 그리고 신의 가르침을 따르는데 그것이 완전하고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한 신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신명기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단 사이비 종교가 보면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악한 행동을 하도록 권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그런 종교들은 한계가 있는 인간이 만든 종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인간이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교리가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있다면 무슨 신이겠습니까? 인간이 만들어냈다는 것을 반증하지 않겠습니까?

 세계사를 읽어보면 문명의 시작에 대해서 나옵니다. 큰 강 근처에 인류는 문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량을 조절하지 못해 농사가 잘 될 때도 있지만 망할 때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느끼게 되고 그 유량을 조절해 줄 절대자 즉, 신들을 만들게 됩니다. 물의 신, 바람의 신, 농사의 신 등등을 말입니다. 윤회 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한국 기독교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김용옥 교수의 책입니다.)이라는 책을 보면 윤회 사상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곡식들이 자라고 없어지고 또 시간이 지나면 곡식들이 자라는 것을 보며 자연은 순환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윤회 사상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이 나옵니다. 이해 되지요? 내가 이해하는데 인간의 범주 안에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심지어 세계의 유명한 신학 대학원 교수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삼위일체도 아직까지 이해되지 않는 교리이며,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라는 것도 정확히 설명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최소한 모든 인간의 이해 범위를 뛰어넘는 것이 있어야 진짜 신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21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인간의 한계를 이야기하시고 있습니다.


 지혜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스스로 판단하여 보십시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예수를 믿어도 난 왜 예수를 믿는가? 예수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 속에 그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견고한 반석 가운데 서게 됩니다. 또한 여러분의 삶 가운데 결정해야 할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고 결론을 내리시며 그대로 살아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을 줄 것입니다.

시편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지금 저는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말씀을 가지고 명확하게 주의 뜻을 이해한다면 저는 과감히 그것을 행할 것입니다.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가 저에게 괴로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 한 구절을 가지고도 일주일 동안 싸워보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깊게 새겨 보십시오. 삶을 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자매가 저에게 전화를 해서 성경은 이 시대의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 답을 내리고 있지 않다라고 말한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과감히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원리를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혜있는 자들아,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생각하여 보라고 하고 있습니다. 지혜있다 하면서 쓸 데 없이 다른 일을 생각하느라 정작 하나님 뜻을 생각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다른 일에는 잘 생각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생각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에베소서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15절을 읽고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기도하며 생각하길 원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한계를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배우고 그것을 통해 주의 뜻을 발견하며 실천하길 원하오니, 우리 가운데 주의 지혜로 채우시고, 주의 말씀을 가지고 고민하게 해 주시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특히,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지를 성경을 통해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AND

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 상세보기
전시륜 지음 | 행복한마음 펴냄
유쾌한 인생론을 펼친『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 이 책은 평범한 인간의 삶을 통해 행복과 인생살이, 지혜로운 생활을 하는 방법을 들려준다. 생활의 평범함에서부터 자연에 관한 놀라운 사색과 유머, 성실성을 담은 글들을 통해 일상속의 아름다움과 유쾌함을 읽을 수 있다.
롯데리아에서 책 읽다가 미치도록 킥킥 거렸던 책.
이렇게 재미있게 읽었는데, 아무도 나의 행동에 관심없었던...
역시 사회는 이렇다니까 남이 어떻든 관심이 없어... ㅎ

재밌냐고?
개콘의 달인 아저씨처럼
안 읽어봤으면 말하질말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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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Mine

biblical things 2008. 7. 24. 15:28
차를 타고 다니면 극동방송을 자주 듣게 된다.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때가 많은데, 듣다 보면 한숨이 나올 때가 많다. 그들을 비판하려는 것도 아니고 정죄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 애정이 있다. 말씀을 균형있게 가르쳐서 좋은 영향력들을 주길 바란다. 이것은 나 자신에게도 무지 요구되는 것이다. 나 자신도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며 그렇게 살지 못하기에 항상 하나님께 눈물나도록 죄송스럽다.

한 목사님의 설교를 몇 번 들었는데, 이 분은 우리나라에서 강해설교를 가장 잘 하기로 유명하신 모 교회의 목사님이다. 최근 몇 번의 설교는 십일조와 관련된 것이었고 헌금과 관련된 것이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철저하게 지키라고 말하고 있다.

난 왜 사람들이 말씀을 균형있게 못 보는지 모르겠다.
하나님이 내 것이라고 말할 때 여러 가지가 있었다. 십일조도 있고 다른 것도 있다. 그런데, 다른 것의 비중이 훨씬 큰데, 십일조에 대한 부분이 하나님이 내것이라고 말한 가장 큰 것처럼 말씀을 곳곳에서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한심스럽다.
하나님의 관심이 물질에 있었는가?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인간에게 있었다. 창조때에도 인간을 위해 모든 자연을 만드시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셨다.
노아의 홍수때도 인간이 잘못하여 창조의 모든 것도 같이 멸망당하였다.

아래는, 하나님이 내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하신 것을 성경에서 찾은 것이다. 이 외에도 더 있다.

 

Mine이라고 나와 있는

[Ex.13:2]Consecrate to me all the firstborn; whatever is the first to open the womb among the Israelites, of human beings and animals, is mine.

[Ex.19:5]Now therefore, if you obey my voice and keep my covenant, you shall be my treasured possession out of all the peoples. Indeed, the whole earth is mine,

[Ex.34:19]All that first opens the womb is mine, all your male livestock, the firstborn of cow and sheep.


[Lev.20:26]You shall be holy to me; for I the LORD am holy, and I have separated you from the other peoples to be mine.

[Lev.25:23]The land shall not be sold in perpetuity, for the land is mine; with me you are but aliens and tenants.


[Num.3:12]I hereby accept the Levites from among the Israelites as substitutes for all the firstborn that open the womb among the Israelites. The Levites shall be mine,

[Num.3:13]for all the firstborn are mine; when I killed all the firstborn in the land of Egypt, I consecrated for my own all the firstborn in Israel, both human and animal; they shall be mine. I am the LORD.

[Num.3:45]Accept the Levites as substitutes for all the firstborn among the Israelites, and the livestock of the Levites as substitutes for their livestock; and the Levites shall be mine. I am the LORD.

[Num.8:14]Thus you shall separate the Levites from among the other Israelites, and the Levites shall be mine.

[Num.8:17]For all the firstborn among the Israelites are mine, both human and animal. On the day that I struck down all the firstborn in the land of Egypt I consecrated them for myself,


[Ps.50:10]For every wild animal of the forest is mine, the cattle on a thousand hills.

[Ps.50:11]I know all the birds of the air, and all that moves in the field is mine.

[Ps.50:12]"If I were hungry, I would not tell you, for the world and all that is in it is mine.

[Ps.60:7]Gilead is mine, and Manasseh is mine; Ephraim is my helmet; Judah is my scepter.

[Ps.108:8]Gilead is mine; Manasseh is mine; Ephraim is my helmet; Judah is my scepter.


[Is.43:1]But now thus says the LORD, he who created you, O Jacob, he who formed you, O Israel: Do not fear, for I have redeemed you; I have called you by name, you are mine.

[Is.66:2]All these things my hand has made, and so all these things are mine, says the LORD. But this is the one to whom I will look, to the humble and contrite in spirit, who trembles at my word.


[Ezek.16:8]I passed by you again and looked on you; you were at the age for love. I spread the edge of my cloak over you, and covered your nakedness: I pledged myself to you and entered into a covenant with you, says the Lord GOD, and you became mine.

[Ezek.18:4]Know that all lives are mine; the life of the parent as well as the life of the child is mine: it is only the person who sins that shall die.


[Hag.2:8]The silver is mine, and the gold is mine, says the LORD of hosts.


[Mal.3:17]They shall be mine, says the LORD of hosts, my special possession on the day when I act, and I will spare them as parents spare their children who serve them.

하나님이 내 것이라고 말할 때 가장 빈도있게 말한 것은 사람이었다. 너희들은 내가 창조한 사람이다. 너희들은 나의 백성이다. 이 점이 가장 많이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너희가 가진 모든 것들도 내가 준 것이기 때문에, 너희는 나를 섬기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살고 자기가 가진 것이 다 자기 것이고 자신 존재 자체도 그냥 생겨난 존재라고 믿고 살기 쉽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이 내가 만들었으니 나를 따르는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무엇을 바치라는 의미보다 너희는 나의 백성임을 기억하라는 의미가 더 가까운 것이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 가장 큰 의미였다. 십계명의 첫 계명처럼 말이다.
십일조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왜 십계명에 십일조 내라는 이야기가 안 들어가 있는가?
십일조는 하나님 것이라고 십일조 바치라고 이야기하기 보다는 차라리 솔직하게 교회를 운영하는 데 있어 돈이 필요하다고 이야기고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구제나 사역자들 사례에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낫다고 본다.,
십일조 자체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서 부터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께 구별된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따르라고 말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본질적인 의미에 더 가까울 것이다.

p.s.
이런 맥락에서 사역자는 교인들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고 두렵고 떨림으로 그들을 섬겨야 한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