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인생의 아픔을 보여주는 한 장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룟유다 이야기입니다.
26: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26: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26: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26: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27: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7: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27: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27: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27: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유다는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에게 기대했던 일들이 벌어지지 않자 마음에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은 이게 아니었는데! 왜 예수는 이런 답답한 모습만을 보이고 있는지.
그래서 그런 답답함과 원망들이 마음에 쌓였겠지요.
이런 것들이 분노로 이어져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자들에게 넘겨줄 계획을 짭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의 무리들과 신호를 짜 맞추어 예수 그리스도를 지목하고 그들에게 넘겨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넘겨질 때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릴 때 예수님은 귀를 고쳐주시면서 폭력적인 일을 하지 말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냥 그냥 잠잠히 끌려 가십니다.
이 모든 장면을 목격한 가룟 유다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차라리 예수님이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비난하고 흥분하시고 뭐라 하시면 아마도 마음의 죄책감을 덜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나쁜 행동을 보시고도 그냥 끌려가십니다. 그냥 가룟 유다의 일을 행하라고 하시면서 어린양처럼 끌려 가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눈은 사랑과 안타까움을 갖고 계속해서 가룟 유다를 바라보셨습니다.
이 사건 후에 가룟 유다는 아마 지난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떠올리고 오늘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자책감이 들었고 스스로 뉘우치게 되었으며 그런 아픔들로 인해 자살이라는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27:3-5)
예전에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쁜 일을 행합니다. 어떤 사람의 자녀를 죽입니다. 그런데, 자녀의 아버지는 아무런 말 없이 살인자를 바라보며 용서합니다.
그런 행동들이 살인자의 마음에 동요를 불러 일으킵니다. 차라리 자신을 욕하고 미워하지 왜 아무런 말 없이 그냥 용서할까? 이런 행동이 괴로워 이 살인자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합니다. 자신의 행동을 자책하고 후회하며 용서를 빌면서 말입니다.
와호장룡의 마지막 장면도 떠오릅니다.
장쯔이는 자신의 삶 속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 입혔던 모습들을 나중에 깨닫고 혼자서 높은 산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우수에 찬 눈빛으로 산에서 뛰어 내립니다. 그 마음속에 자신 때문에 상처 입고 해를 당했던 사람들에 대한 용서의 의미를 담고 어렵고 눈물이 가득한 세상에서 자유로와지려고 합니다.
이런 비슷한 심정이 아마도 가룟 유다에게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는 한 번도 가룟 유다를 쫓아내거나 뭐라고 하신 적이 없으시고 끝날까지 함께 하시며 성찬을 하시고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끝까지 대하신거죠.
심지어 유다의 배신으로 잡혀 가실 때도 가룟 유다에 대해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눈은 어떤 눈으로 유다를 바라보셨을까요?
유다를 그토록 죄책감과 뉘우침으로 몰아넣었던 예수님의 그 눈은 사랑의 눈이었을 겁니다.
안타까웠던 것은 유다는 예수님이 왜 순순히 죽음을 선택하셨는지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한 것이었지요.
유다같은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한 것이었지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유다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아오길 원하셨을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 더 깊게 생각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자살을 선택하지 않고 참회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도 바울처럼.
사도 바울도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동참했지만, 예수를 만나고 나서 아마도 그 일을 후회하고 자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죄인중의 괴수였음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을 주기 원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소망되시는 것을 알게 되며 그 생명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가룟 유다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어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왜 예수 그리스도가 이런 우리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 속에는
어떤 사람도 배제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자신이 죽으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삶이 힘드십니까?
누구에게 상처를 입히셔서 죽을만큼 괴로우십니까?
그럴 때 그것을 극단적인 행동으로 가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아래, 예수 그리스도 사랑안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눈은 계속 우리를 향하시며 사랑으로 바라보시며 안타까움으로 바라보십니다.
그 눈이 계속 우리를 따라다니십니다.
삶에서 우리가 눈물을 흘리고 어려움을 당하고 부끄럽고 후회스럽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기쁨으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시편 1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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