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철을 타고 학교로 오는 길에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의 사건이 계속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일을 해야 하나님 뜻에 합당할까 고민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는데, 내가 있는 곳의 상황은 어떤 큰일을 하기에는 턱없어 보이고
그렇다고 해서 일상 가운데서 그냥 그렇게 살기는 싫고...

우리 안에는 무언가 큰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관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한국의 경쟁적인 사회 구조가 끊임없이 우리 가운데
무언가 성공적인 일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문 기사를 봐도
누가 어떻게 공부했더니 이렇게 좋은 학교에 들어갔다.
누가 이렇게 노력했더니 엄청 부자가 되었다 이런 기사들 일색입니다.

또한 교회내에서도
누가 이렇게 기도하고 꿈을 품었더니
이렇게 큰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이런 말들을 적지 않게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모습을 보면
어떻게 보면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은 얼마 안되는데, 나도 큰 일을 하고 싶은데...
라는 한숨이 나오기도 합니다.

무리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라고 합니다. (마 14:16)
그러나, 제자들은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라고 합니다. (마14:17)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
어찌 수많은 무리들을 먹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축사하시고
무리들에게 나눠 주십니다.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명이나 되는 사람이 다 먹고도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 14:20-21)

우리가 가진 것이 너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껏 실천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돕는 등의 작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크게 못 이루는 작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능히 우리의 작은 몸짓으로도 실천으로도 그것을 하나님 나라를 크게 확장하도록 이끄십니다.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냥 일상의 생활 가운데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기도 하나가 전세계의 부흥을 이끌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크게 확장하시는 주체는 우리의 큰 사역이 아닌,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진 것이 이것뿐이라는 태도에서 벗어나
이것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하나님께서 쓰시도록 하는 것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태도일 것입니다.

저는 어떤 사람을 기억합니다.
그 분은 전임 사역자를 하시고 싶으셨는데, 그렇게 되지 못하여
직장 가운데 일하고 있습니다.
그 분 안에는 자유함이 없습니다.
내가 전임 사역자를 했었어야 하는데, 이런 생각 때문에
직장 가운데 만족을 느끼고 있지 못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이 부르신 뜻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그 분이 직장 가운데 있어서, 그분의 작아 보이는 것들을 하나님께 드린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그 작은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직장 안에 우리 나라안에 세계 안에 행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작은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생각할 수 없이 크게 확장시키십니다.
왜 굳이 작은 것일까요?

그것은 작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약하나 하나님은 강하시고 하나님께 더더욱 의지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약할 때 곧 강하게 됩니다. 그 강함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뿐이니이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명이나 되었더라.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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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단계

biblical things 2007. 10. 19. 22:12
신앙이라는 것이 좋다 안 좋다를 판가름 하기는 어렵지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신앙 생활에 단계를 굳이 두어서 이 글을 전개하고자 합니다.

교회에는 다양한 구성원들이 있습니다.
아기부터, 어른까지 다양한 구성원들이 존재하고 있죠.
가정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자녀들로부터 나이가 많으신 분들까지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은 발달 단계가 있고, 그 단계에 맞춰 정서적인 발달이 요구됩니다.
아직, 밥도 잘 못 먹는 아기에게 밥을 먹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요할 수 없겠죠.
그리고,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해 제 멋대로 돌아다니는 아기에게
너 왜 그렇게 상황 판단을 못하니? 가만히 점잖게 앉아서 있으라는 말을 하는 것도 어색합니다.

다 상황에 맞는 때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사랑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뭔가 앞뒤가 안 맞겠죠...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를 따라야 한다는 것은 정말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에게
그 말을 한다는 것은 뭔가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하심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다면 말을 해야 겠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자신의 욕심에 맞춰서
신앙 생활은 이러이러 해야 한다고 틀을 만들어
미성숙한 아이 같은 사람들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상황이 어느 상태에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아직도 느껴지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의 하나님이신가를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아는 자라면
다음 단계의 도전을 주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어찌보면 말할 수 없는 강박관념이 있는 듯 싶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주변 나라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경쟁 속에서 살아와서 그런지 몰라도
무엇인가 어떤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얽매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신앙을 그런 식으로 접근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자신의 욕심을 내려 놓고
과연 자신에게 필요한 신앙의 단계가 무엇인가를 점검해 보며
차근차근 하나씩 성령께서 바꾸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좀 더 바람직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저도 예전에는 하나님 저를 확 바꿔 주십시요. 이런 기도를 자주 했었는데,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이런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주권자 되시며 저를 빚어가시옵소서.
그것이 아주 조금의 변화라도 하나님께서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욕심 부리지 말고
성령께 맡기며 조금씩 변화되어야 하는 삶이
자신이 주인이 되지 않고
하나님이 주인되는 행동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일 때는 어린아이대로,
청년일 때는 청년의 도전을,
아비일 때는 아비의 도전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요새, 대학생들을 보면 참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찬양을 열정적으로 드리고, 눈물도 흘리고 기뻐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감정적인 것 보다는 좀 더 고차원적인 조용한 가운데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르라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젊은이들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빚어가시고 사용하시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열정에 대해서 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보일 것입니다.

중고등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게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에 감격하는 그것을 보며
십자가의 희생과 헌신이 왜 부족하냐고 말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좀 더 좋을 듯 싶습니다.

그러나,
마땅히 신앙 생활을 오래하고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거나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중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의 모습을 보일 때는
아비의 품성을 가지도록 도전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 자들은
마땅히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희생하고 섬기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AND

좀 우스꽝스럽고 당혹스럽게 여겨지는 말일 수도 있지만
저는 큐티를 하면서 나타날 수 있는 약간의 위험성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말씀 묵상자체가 위험한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말씀 묵상의 방법이 우리에게 은연중의 위험을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 예배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은혜를 만들어내지 말고 하나님만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예배 인도자로 섬겼습니다.
정말 중요한 예배는
회중들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불붙는 떨기 나무에서 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예배의 분위기나 감정 적인 것에만 자신을 맡겨 은혜 받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참 위험한 일입니다.

말씀 묵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 묵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됩니까?
말씀 묵상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을 취해서 적용점을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큐티를 보통 하게 될 때
우리는 말씀을 여러번 읽고 눈에 들어오는 구절을 묵상한다음
하루에 적용할 점을 찾습니다.

여러분의 상황 가운데 맞는 말씀을 여러분들이 취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삶에 적용하려고 말씀을 선택하는 것이 되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말씀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보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서 있지 않다면
그 말씀 묵상은 제대로 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말씀 묵상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여러분들을 발견하게 된다면
여러분들의 삶은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태여 적용점을 만들지 않아도
길을 가는 도중에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살아서 여러분을 이끄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얼마전에 창세기 1장을 공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다는 것을 공부하고 묵상했습니다.
저는 어떤 적용점들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며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사랑, 인간을 향한 존엄성의 부여를 느꼈습니다.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지하철 역을 내려가는데
때가 꼬질꼬질한 노숙자 분을 보았습니다.
그 때 저는 가지고 있는 돈의 일부를 그분에게 주었는데
그때 이런 말씀이 흘러갔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분이다.'
그 노숙자 분이 인사할 때, 저는 더 허리를 숙여 그 분을 존경하며 인사하였습니다.

말씀이 사역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적용점을 찾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이 스스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적용점을 억지로 만들어내고 은혜를 억지로 자아내려는 묵상은 바른 묵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그 분의 임재 가운데 있는 것만으로도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마치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부는지 알지 못해도
길을 가듯이
우리의 삶을 말씀이 스스로 사역하는 것입니다.
AND

만약 성경의 모든 부분들이 정말 분명하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약간은 제한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어떤 계층에게는 그 말씀이 정말 많이 다가오겠지만은,
어떤 계층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해될 수 없는 부분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이 어떤 의미에서는 훼손될 가능성도 있다.

성경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며, 해석에서 열려져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정말 명확한 답변을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답답한 일이지만
구원의 소식을 성경을 통해 모든 계층에게 전달하려는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다.

오늘날,
많은 곳에서 자기 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주장에는 위험이 따르며
하나님의 천국의 확장성을 제한하는 한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단,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여태까지 배웠던 것의 고정관념에 묶여 있지말고
성경을 직접 붙들고
성령 하나님의 조명아래 기도하면서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 성령의 빛 아래서 말씀이 새롭게 다가올 것이며
각자에게 가장 좋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말씀을 일깨워 주실 것이다.

사람을 다양하게 만드시고, 그 고유한 개성을 주신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도 각자에게 가장 맞게끔 그러면서도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계시하실 것이다.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다른 면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며
하나님의 사랑의 광대하심을 다시한 번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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