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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08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2. 2007.12.17 덴버 ywam 총격사건에 대해 듣고
  3. 2007.12.06 사도행전 5:1-11
  4. 2007.11.21 아침 눈을 보면서. 2
  5. 2007.11.19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의 사진 몇 장

성경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입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 즉, 아브라함, 다윗 등과 같은 사람의 삶이 핵심이 아닌 것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고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창조에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창세기에서도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멸시하고 잊어버리고 자기 스스로의 세상을 만드려고 하나님의사랑을 끊임없이 거절하는 과정 중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은 아브라함이 무엇을 잘해서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사랑이 아브라함을 통해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선택하셨습니다.
여기에 인간이 무슨 자기의 의나 자랑을 더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 즉, 기쁜 소식은 아무런 자격이 없고 아무런 대가 없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가장 하이라이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성경을 읽게 되며 무슨 적용점을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율법주의적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전적인 사랑,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의 표현임을 알게 된다음 삶이 하나님에 의해 다루어지길 원하는 사람은
은혜의 복음을 알기 때문에 그에 따라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맡겨 우리 안에 하나님이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합당한 길을 찾기 때문에 그것이 짐이 되지 아니하고 자유롭고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 하나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이 부담이 되시고 어려움이 느껴지시고, 자유가 없다면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은혜의 복음을 체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그 길이 생명의 길임을 알기에 삶을 제자의 삶으로 놓는 것에 대해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성경의 메세지에 대해 삶의 적용점만을 찾는다면 큰 오해를 하시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여러분들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은혜가 얼마나 큰지,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체험하면서 나오는 자발적인 반응인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이 주는 삶의 변화인 것입니다.
자발적인 반응이라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름아닌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삶을 다루어 가시도록 내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복음을 체험한 사람은
성령께서 자신의 삶을 다루도록 내어 드리며 그 삶의 변화 아래 자연스럽게 삶이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계속 그런 논리를 펼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어찌하여 우상을 숭배하고 음란에 빠져들고 거짓 메세지에 넘어가느냐?
복음을 체험한 사람은 이럴 수는 없다.
이런 이유는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는 것입니다.

이런 큰 맥락에서 바울 서신을 보아야지
윤리적 적용부분에 초점을 맞춘다면
바울 서신이 윤리적 적용을 말한 근본적 원인,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는 것이 됩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이고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 은혜에 감사합니다. 내 힘으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길을 따르길 원합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AND

친구 로버트가 자세한 사항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덴버 ywam에 총격사건을 일으켰던 사람은 놀랍게도 2002년 덴버 ywam에서  dts를 하던 형제였습니다.
훈련을 받을 때 안 좋은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헤비 메탈을 특히 좋아했던 그 형제는 훈련받는 동안 사탄worship 곡들을 부르는 등의 행동을 하여, 간사들이 협의하에 형제의 훈련을 중지시켰답니다.
그후, 그 형제는 4년동안 그 마음속에 분노가 있었는지 이 사건을 일으키게 되었답니다.
denver 베이스에서 2명을 죽인뒤, new life church로 이동하여 사람을 죽이다가 교회 safe guard에 의하여 총을 맞고 쓰러진다음, 스스로 총을 자신에게 쏘아 자살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제 마음 속엔 참 아픔이 있었습니다.
쓴뿌리라는 것은 이토록 가슴 아픈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지요.

저도 쓴뿌리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여러 통로를 통해 쓴뿌리가 은연중에 많이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쓴뿌리가 이유없이 사람에 대해 적대감을 갖게 하거나, 특정 계층에 대한 더욱 더 많은 불만등을 표출하는 형태로 나타나곤 했죠.
물론, 이 쓴뿌리가 저의 문제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방적으로 상처를 받음에 의해 이 쓴뿌리가 자라게 된 것입니다.

치유 사역에도 가 보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쓴뿌리가 있습니다.
교회로부터, 직장으로부터, 학교로부터, 가정으로부터 받은 상처들이
쓴뿌리가 되어 내면 깊숙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쓴뿌리는 결국은 자신에게 피해를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합니다.
왜냐면, 쓴뿌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왜곡된 형태의 사랑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특히, 리더들이 이 쓴뿌리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양들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자신의 쓴뿌리는 힘든 상황 속에서 가시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 가시가 다른 사람을 찌르게 되는 거지요.

따라서, 이 쓴뿌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용히 하나님 앞에 앉아,
나의 쓴뿌리가 무엇인지를 보면서
예수 보혈의 피로 덮고, 성령의 불로 태우는 것이 필요하지요.

그럴 때, 우리 안에 사랑이 넘쳐나게 되고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도 사랑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AND

드디어 기말고사가 끝나고 자유로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지만요...
오늘 나눌 이야기는 사도행전 5:1-11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얼마를 베드로 앞에 가져갑니다. 소유를 판 돈의 일부를 바치면서 마치 전부인 것처럼 속일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부분에 대해 강하게 질책하면서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3절,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9절과 같이 말하며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 부분을 사도행전에서 읽을 때마다 많은 곤혹감에 사로잡혔던 것을 기억합니다. 마침 채플에서도 이 부분을 언급한 교수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도대체 이 부분이 무엇을 의미할까 생각해 보곤했습니다.

 기숙사 방에서도 룸메이트들에게 경건회를 하면서 도대체 이 부분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생각을 나눠보라고 했었는데, 명확한 대답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얘기를 거듭나누면서 발견했던 사항들이 있습니다.

일단, 이 부분은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난 부분에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났다면 어느 정도의 강력함이었을까요? 이것이 이 부분을 이해하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오순절의 성령이 임하여서 사람들이 성령을 체험하고 방언을 하기 시작하고, 기적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공회 앞에서 메세지를 강력하게 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으로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4:32)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쯤되면 성령의 임재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이 성령을 체험하고 성령의 강력한 능력아래 행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5장의 내용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죠...

생각을 해 보십시요. 성령의 역사가 이렇게 강력하게 나타났을 때, 이 성령의 공동체에서 거짓말하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었을까요? 굉장히 어려운 부분이었겠죠.
우리가 교회에서도 성령의 역사가 거의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고 사람의 행동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목도하는 상태에서 자신을 속이는 행동을 하면서 그 행동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것이 쉬운일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런 일을 행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성령의 강력한 임재 가운데 소유를 나누는 것을 보면서도 이러한 일을 행하게 됩니다.
이럴 때 베드로는 하나님의 영을 시험했다는 말로 그들의 행동을 규정합니다.

이 상황을 오늘날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요?
어떤 권위자의 메세지에 반감을 갖거나 비판의 말을 하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시험하느니 이런 말을 쓰는 곳도 있습니다. 위 상황과는 굉장히 거리가 먼 것이죠.^^;;;

좌우지간,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의 강력한 임재 가운데 나타나는 정결함, 부의 나눔, 등의 성령의 불로 정결케 되는 상황 가운데 모든 사람이 변화되는 그 변화의 흐름을 거절하는 곳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강력한 임재와 그 변화성 앞에 사람이 서 있다면 결과는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성령의 이끄심 아래 변화되거나, 아니면 거스려서 존재가 소멸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인간은 근본적으로 존재가 소멸될 수 밖에 없는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임재 가운데 예수 보혈의 피로 정결케 되어 하나님과 화목되거나 아니면, 멸망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 성령의 강력한 임재 앞에 서 있게 되었는데, 그 흐름 가운데 있게 되었는데, 그들의 삶이 성령에 순종하여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거스르는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그 결과는 위에서 말한 그대로입니다.

이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임을 당한 이유 그 자체보다는 더 큰 맥락에서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어느 것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어떻게서든지, 사람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 세계에 전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성령이신거죠.

사람들이 여러 어려운 가운데 핍박을 받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긴 했지만, 그 어떤 것도 성령의 강력한 임재와 복음 전달의 의지를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령은 이토록 위대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영인 것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영 앞에서 감히 서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히 사람을 살리시고 생명을 주시지만, 그 반대도 행하실 수 있는 위대하고 광대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위엄을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성령은 어마어마합니다.

이 성령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이 다루어지고 변화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고 우리의 삶이 정결하여 지며, 거룩해 지는 것은 우리 가운데 풍성함과 기쁨과 소망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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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서울에는 눈이 두번째 내렸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밖을 보니 온통 새하얀 옷을 나무들이 입고 있더군요.
너무나 하얀 모습이 주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거리는 얼음이 살짝 얼어 있더군요.
사람들이 무척 조심하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내딛고 있었습니다.

저도 학교 가는 길에 무척 조심스럽게 갔죠.
넘어질까봐요...

요새 고린도전서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살면서 사람들은 상처를 많이 주거나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말을 하기도 합니다.
어차피, 상처주는 것은 있을 수 밖에 없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으니 상대방이 상처 받는 것은 하나님이 다루실 문제이고
그런 말 때문에 상처 받는 다면 뭘 하겠는가?
이런 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생각하면 어떤 말로도 위의 말들이 정당화 될 수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품으시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위해 어떤 어려움도 겪으시면서
찾아다니시던 분이셨으니까요...

우리가 너무 길을 쉽게 달려가고 있지는 않을까요?
길이 빙판길임에도 말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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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국전쟁이 끝난지 4년 뒤인 1957년 12월.
미국신부 알로이시오(한국명 소재건.1930~1992.사진(中)에서


이 사진들을 보면서 6.25 세대의 삶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전쟁 중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 그리고 가난들...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도록 일으켜 세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있었습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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