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biblical things 2008. 2. 4. 18:45
때로는 내가 할 수 있어도 하지 않는게 좋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서울역에 아내와 아이를 마중나갔습니다.
날이 많이 춥더라구요.
아기 짐들과 기타 여러 짐들이 있어서 그 짐들을 싣기 위해
서울역 주차장에 주차하고 방문권 하나 끊어서 아내와 아이가 탄 KTX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찬 바람이 얼굴을 때리더군요.
어디 따뜻한 곳에 들어가 있다가 나올까 하다가
시간도 다 되었구 해서 그냥 기다렸습니다.

열차가 들어오고
저를 보고 좋아하는 아이를 보면서 짐을 내렸습니다.
제가 충분히 들 수 있을 정도의 짐이었는데
나이가 드신 60대로 보이는 아저씨가 와서 자신이 짐을 실어다 주겠다고 그럽니다.

처음에는 그냥 내가 가지고 가겠다고 했지요.
왜냐하면 돈이 드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주님이 제 안에 그분께 짐을 맡기라고 하시더군요.
그 분께 얼마냐고 물으니 4000원이랍니다.

4000원 적은 돈은 아니지요.
그래도 순간 제 안에 저보다 더 어렵고 이 찬바람 속에서 하루 종일
짐 나르면서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저토록 노력하는 아저씨를 보면서
그 돈 절약하겠다고 제가 드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습니다.

아저씨는 뭐가 그리도 신나셨는지
싱글벙글하시면서 짐을 레카에다가 싣고 따라오라고 하면서
저희가 주차된 곳까지 열심히 가셨습니다.
가면서도 만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하루 종일 벌어도 8000원 벌 때가 있다고 하시더군요.

아무튼 그 분의 얼굴에 가득한 웃음과
찬바람 속에서도 열심히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하시는 모습을 보며
나름 감동했습니다.

차에 도착하여 그분에게 4천원 대신 2만원을 손에 쥐어 드렸습니다.
설도 되었는데, 돈이라도 충분하면 가족들에게 고기라도 사 가지고 가실텐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동안 그 아저씨는 돈을 받고서는 정말 여러번 고개를 숙이시면서 감사하다고 자리를 떠나지를 못하더군요.
제가 오히려 죄송스럽고 그래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세상에는 내가 무엇을 할 능력이 있어도 이웃을 위해 하지 않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내 돈 아끼는 것도 좋지만 아끼는 것이 오히려 안 좋을 때가 있습니다.

공동체도 이와 같습니다.
내가 잘한다고 해서 모든 부분을 내가 다 해서는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세워주는 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AND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제 안에 변화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제 안에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기 때문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그분의 뜻에 무조건 순종하고 싶어집니다.


이상하지요?

이전에는 이해해야지 하나님 뜻을 따르겠습니다. 이런 고백이 흘러나왔는데

이제는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이 하라고 말씀하신 것들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눌 때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이냐면 그 사람을 더욱더 알아가고 그 사람 안에 신뢰가 쌓인다는 것입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전에는 상대방을 잘 모르지만

그 상대방이 날 사랑하고 날 위한 마음을 알 때

그 사람을 향한 신뢰가 쌓이고 날 위해 말하는 어떤 것도 신뢰하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생명을 주시길 원합니다. 복 주시길 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향해 생명의 길로 인도한다는 신뢰가 있으십니까?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그런 확신이 우리 가운데 커지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대함이 생기며 생각보다 단순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성경을 보다 보면

하나님이 이런 것들을 하는 것이 어떻냐고 말씀하신 것들이 있습니다.

이제는 이해되지 않아도 그런 것들을 그냥 하나님을 기대함으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따르려고 합니다.


왜냐면 그 분은 신실하시고

우리를 향한 계획은 생명의 계획이며 영원한 복으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그 단순함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AND

저는 개인적으로 비판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입니다. ^^

전혀 그렇게 안 보이시겠지만요. 사실 성경적으로 진리에 서 있는지 안 있는지를 판단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믿는 자들이 세상을 판단할 것에 대해 말하고 있긴 하지만, 또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헷갈리지요.

어디서는 판단할 수 있다고 하고, 어디서는 판단하지 말라고 하고.

그러나,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을 정리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원칙은 아래와 같습니다.


내가 그 지체가 정말 주 안에서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는가입니다. 내가 그 지체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새 모 목사님들이 잘못된 가르침을 하고 있다고 비판받는 일들이 많습니다. 저 역시 그분들을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제가 확인해야 할 것은 그 목사님들이 정말 주 안에서 바로 세워지고 다시금 하나님의 얼굴만을 구하며, 성도들을 하나님 사랑 안에 세워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제 안에 있는가 입니다.

그것이 없고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면 크리스챤의 비판이 세상 다른 사람들의 비판과 다른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어떤 지체를 바라볼 때 사랑안에서 무엇이든 하라고 말합니다.

비판을 해도 괜찮지만 사랑 안에서 그 사람을 정말로 위하는 마음에서 비판하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생각보다 간단하지만 중요합니다.



우리가 비판을 하려는 사람을 사랑없이 비판하게 된다면 우리안에 분노와 미움과 증오가 싹트기 시작하지요.

그것은 결국 우리 안에 쓴뿌리로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학생 운동이나 노동자 운동을 하시는 분들 가운데 우려되는 점이 무엇이냐면

사랑 안에서 그 사람이 변화되길 원해서 비판하지 않고 비판을 위한 비판,

그 사람이 극단적으로 말해서 파멸되길 원하는 면에서 바라보는 측면도 일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합니다. 그리고 또한 그분들만의 문제도 아니죠. 기독인들 가운데도 이런 분들이 많으니까요.)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자라가고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살도록 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사랑안에서 비판하고 있는가를 가장 잘 실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면

내가 어떤 사람을 비판하기 전에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안에서 비판한다는 것은 전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도 성도들이 잘못된 점을 이야기할 때

항상 전개했던 논리가 있습니다.

너희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런데, 너희가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바로 잡길 원한다. 따끔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도 사람들을 질책하실 때

그 사람이 주께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사랑을 담아 질책하셨죠.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진리대로 살자고 말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담아 이야기하고 사랑을 담아 비판하면 좋겠습니다.



아래는 에피소드입니다.

***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지만 광화문 촛불 집회하는 근처에서 중보기도를 하고 있다가 촛불 집회하는 곳에 들렸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국회의원들을 비난하는데, 국회의원들을 모두 죽여버리자 이런 식의 발언을 어떤 사람이 하고 거기에 참석해 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광기어린 모습들이 잊혀지질 않습니다. 그 때 우리 중보기도 모임 팀에게 주님께서 광화문 일대를 사로잡고 있는 분노와 미움의 영을 보여 주셨었습니다. 아직도 섬뜩합니다.

AND

You raised me up! 이란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전 참 약한 사람입니다.
제가 약하다는 것을 압니다. 제가 잘 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시고, 주님이 저를 주 뜻대로 이끄십니다.
무엇을 제가 자랑하겠습니까?

지난 날들을 돌아볼 때
감사한 점들이 참 많습니다.
부족하고 모나고 상처 많은 사람을 주님께서 그냥 부르셨지요.
주님의 눈이 제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저를 향해서 쭉 보고 있었다는 것을
그냥 느끼는 것이 아니라 전율이 나도록 알 수 있습니다.

언제나 저를 볼 때 눈물이 납니다.
왜 이렇게 내 모습 이것밖에 안 될까...
그러나, 주님은 저를 그렇게 보시지 않으니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죄 가운데 방황하며
사람들에게 상처 주면서 살았었는데
이제는 주님께서 저를 변화시키시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군요.

주님!
주님을 닮게 하여 주세요.
주님이 저에게 맡겨주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길 원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길 원하고
그들이 주님만으로 만족하며
삶 속에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길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어 참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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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린도 전서를 보면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7장 25절에 보면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26절에는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40절에는 "내 뜻에는"이라는 표현도 있지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주의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표현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뜻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진리이겠지요.
하지만, 성경에도 바울이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고 이 부분에 대해선 주께 받은 것이 없다고 표현하는 부분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선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글에서 상당히 겸손하게 자신의 생각인지 아니면 하나님께 받은 계시인지를 구분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계시일 때는 그것은 지켜야 할 중요한 개념이겠지요.
그러나, 자신의 생각임을 밝힐 때는 절대성 보다는 의견 존중의 개념에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생각임을 밝히는 부분조차도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일 때는 문제가 많이 생깁니다. 바울 자신의 견해가 하나님의 뜻과 같은 권위를 가져서는 안되는 것이겠지요.

2. 고린도전서를 읽을 때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바울의 1차적인 목표였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관심은 주로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이 쓰는 많은 표현들은 특수한 문제 해결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 테두리에서 고린도전서를 생각해야지 특수 문제 해결 방법을 일반적으로 해석하여 보편화하는데는 무리가 있는 것입니다.

3. 고린도전서 11장 16절에 보면 문제 해결에 있어서 바울은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문제 해결에 있어서 관례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설교자를 위하여...
설교자는 어떤 의견을 밝힐 때 바울과 같이 명확히 자신의 의견인지 주님의 계시인지를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의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주님의 절대적인 계시인양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전통에서 지키고 있는 관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성경적인 진리인양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하나님의 진리는 많이 왜곡됩니다.
우리에게 명백히 성경 전체를 통해 흐르는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타당한 개념이 아닌 경우에는 그것을 절대화하는 메세지를 전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성경 전체를 흐르는 진리인 경우에는 설교자의 의견이나, 교회 전통, 문제 해결을 위한 특수한 방법등의 고정된 관념 체계를 넘어서서 열린 마음으로 진리를 수용하고 그것을 적용하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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