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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1.15 예수의 눈
  2. 2007.11.14 시편 3편 설교문입니다.
  3. 2007.11.09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
  4. 2007.11.06 요새 슬픈 사건 중의 하나
  5. 2007.11.06 지금 우리는 희미하게 보이나

예수의 눈

biblical things 2007. 11. 15. 13:24

오늘은 인생의 아픔을 보여주는 한 장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룟유다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26: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26: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26: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26: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27: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7: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27: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27: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27: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유다는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에게 기대했던 일들이 벌어지지 않자 마음에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은 이게 아니었는데! 왜 예수는 이런 답답한 모습만을 보이고 있는지.
그래서 그런 답답함과 원망들이 마음에 쌓였겠지요.
이런 것들이 분노로 이어져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자들에게 넘겨줄 계획을 짭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의 무리들과 신호를 짜 맞추어 예수 그리스도를 지목하고 그들에게 넘겨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넘겨질 때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릴 때 예수님은 귀를 고쳐주시면서 폭력적인 일을 하지 말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냥 그냥 잠잠히 끌려 가십니다.

이 모든 장면을 목격한 가룟 유다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차라리 예수님이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비난하고 흥분하시고 뭐라 하시면 아마도 마음의 죄책감을 덜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나쁜 행동을 보시고도 그냥 끌려가십니다. 그냥 가룟 유다의 일을 행하라고 하시면서 어린양처럼 끌려 가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눈은 사랑과 안타까움을 갖고 계속해서 가룟 유다를 바라보셨습니다.

이 사건 후에 가룟 유다는 아마 지난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떠올리고 오늘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자책감이 들었고 스스로 뉘우치게 되었으며 그런 아픔들로 인해 자살이라는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27:3-5)

예전에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쁜 일을 행합니다. 어떤 사람의 자녀를 죽입니다. 그런데, 자녀의 아버지는 아무런 말 없이 살인자를 바라보며 용서합니다.
그런 행동들이 살인자의 마음에 동요를 불러 일으킵니다. 차라리 자신을 욕하고 미워하지 왜 아무런 말 없이 그냥 용서할까? 이런 행동이 괴로워 이 살인자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합니다. 자신의 행동을 자책하고 후회하며 용서를 빌면서 말입니다.

와호장룡의 마지막 장면도 떠오릅니다.
장쯔이는 자신의 삶 속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 입혔던 모습들을 나중에 깨닫고 혼자서 높은 산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우수에 찬 눈빛으로 산에서 뛰어 내립니다. 그 마음속에 자신 때문에 상처 입고 해를 당했던 사람들에 대한 용서의 의미를 담고 어렵고 눈물이 가득한 세상에서 자유로와지려고 합니다.

이런 비슷한 심정이 아마도 가룟 유다에게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는 한 번도 가룟 유다를 쫓아내거나 뭐라고 하신 적이 없으시고 끝날까지 함께 하시며 성찬을 하시고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끝까지 대하신거죠.
심지어 유다의 배신으로 잡혀 가실 때도 가룟 유다에 대해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눈은 어떤 눈으로 유다를 바라보셨을까요?
유다를 그토록 죄책감과 뉘우침으로 몰아넣었던 예수님의 그 눈은 사랑의 눈이었을 겁니다.

안타까웠던 것은 유다는 예수님이 왜 순순히 죽음을 선택하셨는지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한 것이었지요.
유다같은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한 것이었지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유다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아오길 원하셨을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 더 깊게 생각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자살을 선택하지 않고 참회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도 바울처럼.

사도 바울도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동참했지만, 예수를 만나고 나서 아마도 그 일을 후회하고 자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죄인중의 괴수였음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을 주기 원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소망되시는 것을 알게 되며 그 생명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가룟 유다를 생각하면 불쌍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 가룟 유다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어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왜 예수 그리스도가 이런 우리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 속에는
어떤 사람도 배제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자신이 죽으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삶이 힘드십니까?
누구에게 상처를 입히셔서 죽을만큼 괴로우십니까?
그럴 때 그것을 극단적인 행동으로 가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아래, 예수 그리스도 사랑안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눈은 계속 우리를 향하시며 사랑으로 바라보시며 안타까움으로 바라보십니다.
그 눈이 계속 우리를 따라다니십니다.

삶에서 우리가 눈물을 흘리고 어려움을 당하고 부끄럽고 후회스럽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기쁨으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시편 1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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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편 설교문입니다. 어떤 계기가 있어 설교문을 만들어 보게 되었습니다.

3: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3: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3: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3: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3: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3: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3: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을 겪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비난들이 우리에게 닥쳐오기도 하고, 그런 상황들이 우리의 마음을 많이 상하게 하여, 한 밤에도 잠을 잘 수가 없어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 머리를 양팔에 파묻고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울음이 더욱더 가슴 아픈 울음이 되어 걷잡을 수 없이 흐느끼거나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 내릴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변에서나 혹은 우리 내면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걸고 있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고 공격받을 때 다가 오는 울음입니다. 즉, 하나님 안에 정체성을 두고 있을 때 나올 수 있는 울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며 따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데 어떤 어려움이나 고난 등을 견디겠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단순한 상황적 어려움의 고난은 어느 정도 견딜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든 것을 맡기고 우리 정체성의 근원되는 하나님에 대한 공격이 다가와서 하나님안의 정체성이 흔들리게 되면 이 슬픔은 깊은 영혼의 탄식으로 이어집니다.

 시편은 단순한 인생의 아픔이나 어려움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정체성을 두고 있는 우리에게 그 정체성이 공격받는 상황가운데서 나타날 수 있는 인생들의 아픔이 묻어있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상황이 힘들어서 느껴지는 아픔이 아니라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 안의 정체성을 공격받게 되어 느껴지는 배가된 인생의 아픔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편 3편은 믿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공격받는 상황 속의 아픔을 잘 드러내주고 있으며 이 시편에 나타난 비슷한 상황들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은 다루어지게 됩니다.

 우선, 시편 3편을 잘 이해하기 위해 배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3편은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 상황과 관련된 구절을 보면 사무엘하 15:14-17절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무엘하에서 보면 다윗은 그의 아들 압살롬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쫓기는 위치에 있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떠나 압살롬에게로 향합니다. 다윗은 이런 상황 가운데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특히, 사무엘하 15장 30절에 보면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그 상황이 힘들었는지, 울면서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의 상황이 단순히 현실적으로 힘든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다윗의 평생의 삶이 하나님과 교제의 삶을 산 모습을 생각해 볼 때, 다윗은 바로 이 상황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을 향한 아픔, 즉 정체성의 아픔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상황이 힘들어서 절망하고 울기 보다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유일한 희망으로 붙들었던 그 하나님이 자신을 버린 것 같은 생각이 다윗의 울음을 자아내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비록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긴 했지만 그 시험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바로 계속하여 하나님으로부터의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시험과 어려움들이 닥쳐오게 됩니다. 그런 사건들의 절정이었던 부분은 바로 겟세마네에서의 슬픔의 기도였으며, 십자가에서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외침속에서 예수님은 영혼의 깊은 아픔이 있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단순한 현실적 상황의 아픔만이 아니라 하나님 안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으로 비롯된 배가된 아픔인 것이죠.
 마찬가지로 다윗의 삶 속에서도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의 숱한 시험가운데 다윗은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그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냈으며 이제는 시험이 끝났다는 생각, 하나님이 그의 인생을 순탄하게 하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 때, 다윗의 평생의 삶도 광야 이후의 평안을 기대할 수 있는 삶이 아니라, 여전히 새로운 광야가 시작되었고 그 가운데 깊은 인생의 슬픔과 하나님 안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들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바로 이와 같은 것 같습니다. 혹시, 40일 광야 이후의 삶이 이제는 광야의 시간을 벗어났으니 하나님이 나의 삶을 평안하게 하시고 내가 이만큼 견디어 냈으니 나를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이끄시겠지 이런 생각은 없는지요?
 일정 기간의 광야 시험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의 삶은 광야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시험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계속되는 것이겠지요. 이 시험은 또 다른 종류의 광야인 심화된 연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의 정체성을 계속 도전을 받는 시간이며, 반면에 하나님을 계속해서 의지하고 붙들며 믿음을 견고히 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40일의 광야 시험으로만 모든 연단의 과정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그 이후에도 그런 과정이 있게 되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닥쳐오는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정체성의 흔들림 속에서 낙심하는지요.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광야의 삶을 통해 더 큰 연단과정을 통해 하나님 안에 정체성을 더욱더 확고히 하며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으며 진리를 분별하고 견고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시편 3편은 노래되어 지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3편 1절 보면
 다윗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이 고백까지는 일반 사람들도 당할 수 있는 상황이지요. 이 부분에서는 보편적인 상황의 아픔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들은 그 상황 자체가 힘들 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로 한 사람에게 그리 견디기 어려운 상황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보호자와 우리 편이 되신 다는 생각이 우리를 힘든 상황 속에서 견딜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상황 가운데 낙망하지 말고 하나님 의지하며 이겨내는 것이라는 가치관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상황적 어려움은 그 자체로 힘들 수는 있지만 주저앉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2절로 진행되면서 어려운 현실 상황의 아픔은 다윗의 영혼의 아픔을 자아내는 곳으로까지 상승되게 만듭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이 부분에서 아마도 다윗은 많은 아픔을 느끼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평생 신뢰하고 사랑하였던 하나님, 그 하나님에 대한 부분을 사람들이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다윗은 평생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의지했지만, 상황의 처절한 아픔 속에서의, 하나님 안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은 일순간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만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한 생각이 들며, 깊은 영혼의 절망감 속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으며 따라가는데, 상황의 처절한 어려움과 아픔 속에서 주의 사람들로부터 너가 이렇게 어려운 것을 보면, 하나님이 너를 버리셨기 때문이야라는 등의 말을 들어보신적이 있으신지요?
 그런 경험이 없으셨다면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맡긴 우리의 정체성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상황의 어려움 가운데 버림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정체성에 대한 어려움 속에서 드는 괴로움 말입니다.

 3편 2절 이후에 셀라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습니다.
 셀라에 대한 정의를 찾아보니 셀라는 시편등에 나오는 음악용어로, "높임", "올리움", "중지"라는 뜻의 '살랄'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셀라는 정확하게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음악적인 지시어로서 "그곳에서 한 박자를 쉰다", "숨을 멈추고 호흡을 고른다"라는 용어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아마도, 시편 기자의 노래 속에서 잠깐 쉬어가게 만드는 이 셀라라는 표현은 상황의 아픔을 잠깐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만드는 하나의 호흡인 듯 싶습니다.

 시편 3편 2절에서 보여지는 하나님 안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을 조금 더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 안의 정체성의 공격은 사람을 통해 나오기는 하지만, 사단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속임을 통해, 성경 전체에서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도 사단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에 대한 거짓 정보를 만들어 하나님을 왜곡시켰으며 인간을 죄 가운데 몰아 넣었으며, 예수님의 시험에서도 사단은 하나님에 대한 부분을 왜곡합니다. 신약에서도 거짓 교사들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하는 등의 거짓된 정보를 만들어 냄으로써 성도들을 미혹케 하고 절망 가운데 넣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거짓 속임수에 대한 이유는 우리를 생명에서 멀어지게 하고 죽이고 파괴하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 상반절에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시편 3편에서 이런 속임수에 대한 일시적인 어려움 후에 다시금 하나님을 생각하며 벗어나게 됩니다.

 3절과 4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며 다음과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원문에 보면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라는 고백 앞에 ‘그러나’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습니다.
 아마도, 1,2절 후에 다윗은 그동안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떠올려 보았을 것입니다.
 다윗의 삶 속에서 숱한 배신과 음모와 처절한 인생의 밑바닥에 있을 때에도, 부유할 때에도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던가를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이 한결 같이 자신을 지키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을 하게 되며 잠시나마 흔들렸던 하나님 안의 정체성을 찾게 되며 사람들의 속임수에 대해 대적하면서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구원자시오,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시험이나 광야 이후의 끊임없는 예수님의 하나님안의 정체성에 대한 시험에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히 아시며, 단호하게 사단을 배척하셨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 안에서의 정체성을 흔드는 이야기를 할 때도, 사단의 실체를 아시며 사단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시고 하나님 안에 정체성을 확고히 하셨습니다.

 시편 3편 4절 이후에서도 셀라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깊게 묵상하고 과연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돌아볼 시간을 주고 있습니다.

이제 다윗은 3,4절의 고백 이후에 자신의 삶에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실지 기대하며, 하나님 안에 신뢰를 두며 승리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5절에서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잠을 못 이룰 정도로 눈물 흘리며 괴로워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자신의 보호자이시며 방패이시다’라는 것을 깨달으며 잠을 이룰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6절에서는 하나님 안에 정체성을 둔 사람의 더욱더 확장되는 담대함의 고백을 볼 수 있습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다윗이 아침에 일어나서 보면 여전히 실제 어려운 상황은 변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세상을 향해 그 수많은 적들을 향해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 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요.
그 기쁨이 얼마나 크고, 이 말씀을 묵상하는 우리에게도 기쁨을 가져다 주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10장 10절 하반절에 “예수님이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누리게 하기 위함이라.”
 우리는 다윗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의 삶의 진정한 의미와 기쁨이 되시는 지를 이같이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더욱더 세상을 향해 가슴을 열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또한 하나님을 향해 더 큰 담대함으로 간구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도움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 하나님이 도움 되시며 소망되신다는 고백에서 자신의 모든 서원을 아룁니다.
7절에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아직 대적자들에게서 구원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의 삶 가운데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고 악인의 이를 꺾으심을 기억하며 구원을 아뢰고, 그 기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원수들을 향해 승리자의 포효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8절은 그 승리의 기쁨이 절정에 달하는 것을 드러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할렐루야.

우리의 구원은 바로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을 자신에게만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메세지를, 하나님만이 오직 유일한 희망되신다는 복음의 메세지를 보냅니다.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아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정체성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상황 가운데 어려움을 우리는 십자가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죠.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는 삶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이 십자가의 삶은 우울하거나 힘든 삶이 아닌 것입니다. 상황이 그렇다 할지라도 십자가는 소망과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로 나타내는 예수님은 우리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단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 것이며
두번째는 그 사랑을 통해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세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기쁨으로 기다리며 고난을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우리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한편으로는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을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었지만 이 십자가가  기쁨의 십자가가 된다는 것을 약간은 생략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감사하지만, 그 십자가를 우리가 지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 우리를 힘들게 하며 우울하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모략이라는 책의 저자인 달라스 윌라드는 다음과 같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초략) 웃음은 진정한 공동체에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니 웃음이 건강에 그토록 좋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웃음은 구속의 상징이기도 하다. 모든 피조 세계에서 구속보다 더 큰 부조화는 없기 때문이다. 구속이 이를 때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시126:1-2)"

 하나님 안에 우리의 정체성을 두고 따라가는 사람들에게는 비록 상황이 어렵다 할지라도 십자가의 삶이 여전히 힘들지라도 이런 웃음과 기쁨이 있으며 시편 3편의 흐름의 마지막처럼 승리의 환호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단순히 슬픔과 힘듬의 연속이 아니라, 기쁨의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 이후,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상황의 어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끊임없는 정체성 속에서도 가슴 속 깊이 흘러나오는 그 하나님 안의 기쁨이 열정으로 넘쳐 하나님을 당당히 선포하며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시며 하나님만이 모든 열방가운데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기쁨으로 감당하고 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안에 정체성을 두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확실히 아는 가운데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의 구원이며 소망이십니다.
하나님 안의 정체성을 흔드는 어떤 사단의 공격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붙드시는 자이시며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유일한 기쁨의 근원되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위로와 소망이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가 항상 기억하며
하나님을 선포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고
이 기쁨의 소식이 우리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편 3편의 마지막 부분처럼 세상 모든 곳 가운데 널리 전파되길 기도하며 힘써야 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우리 안에 하나님을 더욱더 알아가게 하시고,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시는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심을 항상 기억하게 하시옵소서.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 되신다는 고백이 늘 넘치게 하시고, 이 고백이 찬양과 기도가 되게 하시고, 세상을 향한 기쁨의 선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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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는 어떤 자매로부터 국제 전화가 왔었습니다.
외국 생활에서 받는 인종적 편견에 대해 나누면서 어떤 경우에는 열등감과 어떤 경우에는 우월감을 느낀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 가운데 깨달은 것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삶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외국에 있다보니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있어서 도대체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에 대해 갈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백인들에 의해 무시받는 상황 가운데에서 때로는 한국 사람으로 자부심을 드러내고 싶기도 했다고.
또는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가운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자신의 정체성이 한국 사람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한국 사람으로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인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우리의 울타리를 넘어서 다른 인종의 사람들도 형제 자매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우월감을 벗어나 하나님 앞에 동등한 자로 서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우열이라는 경쟁 논리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몸의 부분들이 다 소중하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내가 더 소중하다는 생각가운데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러한 생각들은 관계의 깨짐을 만들게 됩니다.

우리가 무슨 지혜가 있어서 능히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겠습니까?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서 있으며 성령의 다루심 가운데 서로에게 위탁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사람을 통해 가르치시는 성령님의 역사 가운데 있지요.
어느 순간 자기 존재의 우월감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의를 취하며 드러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본다면 우리는 겸손할 수 밖에 없으며 상대의 말에 귀기울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외모로 가진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보는 것이며 성령 하나님의 다스림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은 곧 소속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실제적으로 백성으로의 삶을 사는 실천적인 지향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소속이 되었다고만 여기고 실제로는 소속이 안된 사람으로 사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요.

진정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 때, 우리는 서로를 뜨겁게 사랑할 수 있고 섬김 가운데 기쁨과 생명을 더욱더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편견을 가지고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며 서로가 서로를 긍휼히 여기고 기도하게 되며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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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1809005

위 링크 기사는 어느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의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어머니와 함께 여관에 장기 투숙하던 학생인데, 죽은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죽은 아들과 함께 1주일정도 있다가 나가서 소식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계속 제 머릿속에 맴돌고 가슴에 맴돕니다.
얼마나 슬픈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3월 서울 구로구 B초등학교에 입학한 김군은 5월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간다"며 천안의 한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지만 한달이 채 안된 6월초 다시 B초교로 돌아왔다.

김군이 머물던 월 30만원짜리 여관방은 2평 남짓한 욕실이 딸린 방으로 더블침대가 방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비좁았으며 취사도구.옷장 등 기본적인 가재도구조차 없는 열악한 환경.

28일 부패가 상당히 진행된 김군의 시신이 발견된 방에는 여행용 가방과 비닐백 서너개에 담긴 김군 모자의 옷가지와 책.학용품만이 남아있었고 냉장고 안에는 기본적인 식료품조차 없었다.

김군의 시신을 발견한 여관 주인 방모(64)씨는 "어머니가 김군을 직접 등하교시켰고 나머지 시간에는 거의 방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가 별도의 직업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군의 어려운 환경을 학교 등 주위에서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로 김군은 늘 밝고 씩씩했다.

항상 깔끔한 옷차림에 반에서 가장 뒷줄에 앉을 정도로 키가 크고 건강했던 김군의 표정에서 어두운 그늘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담임교사 고모(53.여)씨는 김군에 대해 "'장군감'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밝고 씩씩하고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성적도 중상위권이고 과제나 준비물을 빠뜨리는 일이 없을 정도로 어머니의 교육열도 커 가정환경이 그토록 어려울 줄 상상도 못했다"고 전했다.

고 교사는 또 "(김군이)15일부터 결석을 했지만 어머니와 직접 통화하거나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았고 '아프다'고 해 그런 줄만 알았다"며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너무나 불쌍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박스의 글은 이 사건의 다른 기사 일부입니다.

어머니와 함께 작은 여관방에서 지낸 아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날마다 생활을 했을까요?
학교에서는 밝고 씩씩하게 지냈지만 밥 한끼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상황을 가지고 지냈다는 것이 슬픕니다.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아들을 보면 눈물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뭐 하나 제대로 먹일 수 없고 아마, 가슴이 너무나 저리도록 울고 또 울고 그랬을 겁니다.
그러다가, 아들은 죽고...
얼마나 슬펐을까요? 평생 한으로 남겠죠.
그 슬픔이 그를 1주일동안 죽은 자식을 바라보며 있게 만들었고 결국은 나갈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겠죠.

이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한국 사회에서 아이를 가진 여자로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일일까요? 직장하나 제대로 없다면 더더욱 어려울 겁니다.
그 아이도 얼마나 불쌍한가요?

이 모든 책임은 우리들에게 있겠죠.
우리들의 무관심과 부족함들이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며칠동안 이 사건을 계속 생각해 보며
그 어머니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21: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21:15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21:1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21: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21: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21: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위 박스의 성경 내용이 이 사건과 비슷합니다.
하갈이 자식과 함께 사라에게 쫓겨나서 광야에서 방황할 때 물이 없어서 자식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소리내어 서럽게 웁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갈은 어미로써 어떤 일도 자식에게 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냥 아이와 떨어져 앉아서 서럽게 서럽게 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아이의 어려움들 슬픔들을 들으시며 아이의 엄마인 하갈에게 생명의 약속을 주십니다.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그리고 눈을 밝히셔서 샘물을 보게 하시고 물을 마시게 합니다.

정말 어렵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힘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생명의 길로 이끄실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큰 아픔을 가진 그 어머니에게도 하나님이 위로하시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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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배 드리면서 옆 자리쪽에 눈이 안 보이는 형제님 한 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결혼하신 형제님인데 참 잘 생기셨습니다.
제 안에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눈이 안 보이시니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게 얼마나 안타까울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 형제님의 아내 되시는 분도 참 아름다우십니다.
저는 그 자매님을 볼 수 있으니 그 자매님의 모습이 어떤지 알 수 있죠.

그 형제님의 마음속에 많은 소원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을 보고 싶다. 어떻게 생겼을까?
얼마나 간절히 원할까요?

영화를 보면 그런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그래서 더욱더 그리워하고.
또는 이별하게 되어 다시는 볼 수 없음을 직감하면서 안타까워 하고...

참 마음 저리는 사랑이지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우리 눈에는 비늘같은 것이 있어서 그 사랑하는 예수님을 직접 볼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간절히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그 얼굴 보기를 원합니다.
과연, 내가 사모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실까? 라는 생각에 많은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우리가 보는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을 통해서 또는 성령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느껴지는 모습의 예수입니다.
눈이 안 보이시는 형제님도 자매님을 촉감을 통해서 어렴풋이 짐작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가슴 에리는 모습이 있죠.
예수 그리스도를 명확히 보고 싶은 간절함이 있어도 단순히 우리가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통한 뿌연 모습의 형상입니다.
그러나, 그 형상을 통해 우리는 기대합니다. 언젠가는 명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며 그 분과 얼굴을 맞대고 사랑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는 소망입니다.

[고전13:12]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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