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들의 통로이다.

따라서,
난 환경들을 통해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것을 들어야 한다.

이 말은
난 어떤 환경 속에서도 불평하지 말아야 하며
난 어떤 사람들보다 우월감을 갖지 말고 학생의 위치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내가 꼭 기억해야 할 점이다.
내가 소그룹을 인도한다고 하여도, 난 그냥 그곳의 일원일 뿐이지 리더는 아니다.
리더는 성령이시고, 성령께서는 모든 멤버들의 입을 통해 말씀을 가르치신다.
따라서 나는 내 입을 성령께 맡기고, 다른 멤버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소그룹의 모습이며 교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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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를 보면, 신앙 훈련을 많이 받았다는 사람 중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훈련을 많이 받았으니까 그만큼 많이 안다는 의미의 생각들...
그리고 교회 나온지 오래 안 된 사람들은 배워야 한다는 생각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역사들을 제한할 소지가 충분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각 개인이 훈련받은 것과 성장 과정 속에서 연단시키신 것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사용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께 순종한다는 것은 모든 공동체의 멤버들을 하나님의 통로로 여기며
그 멤버들에게 서로 겸손과 온유함으로 배워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리더가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배우는 자가 되는 것... 섬기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 보면, 신학을 했다는 이유로, 어디에서 훈련받았다는 이유로 그것을 하나의 권위처럼 내세우는 경향이 많아 자랑으로 삼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전체 몸의 한 부분으로 조금 더 제 기능을 하기 위해 모양을 갖춰가는 것이지, 머리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몸의 부분들에 비해 우월한 것도 절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머리고 우리는 모두 몸의 한 부분이며 서로가 맡은 부분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되는 것입니다.
AND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당신은 어떻습니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당신은 누구입니까?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곳에서 당신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이런 질문을 저 자신에게 해 봅니다.

그렇지만 그 곳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AND

본문은 여호수아 1:1-9절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면 우리에게 많은 의미가 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보호 아래 있으면 그냥 좋겠다 이런 느낌이 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떠나 보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자의나 타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님이 이혼을 해서 부모님 두 분과 같이 못 지내는 경우도 있고, 또 사랑했던 사람들을 떠나 보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인생을 포기하고 싶다는 절망감이 들어도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달려가야 할 목적지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바로 이런 마음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봐도 우리는 분명한 목적지인 하나님의 그 영원한 나라가 있습니다. 그 길을 우리는 세상에서 어려움이 있더라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를 굳이 집어 넣지는 않겠습니다.
여호수아 1: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모세가 죽은후...
모세라는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어떤 존재 였을까요?
모세는 이집트 땅에서 노예 상태로 고생하던 사람들을 이끌고 광야 길을 헤쳐 나온 지도자였습니다.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항상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많은 기적들을 보여 주셨고, 모세는 하나님과 친구처럼 친밀했었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모세에게 나아와 재판을 요구했고,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모세를 불러서 하나님께 기도하게끔 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그들 가운데 넘쳤고 그들은 광야 가운데서도 부족함 없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모세에게 반역했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있지만 같이 고생하며 모세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봤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모세라는 사람은 큰 기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세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라는 사람이 후계자로 지명되었습니다.
여호수아의 마음에서 보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자신이 의지할 수 있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그 훌륭한 지도자 모세가 죽었을 때, 아마 상실감도 크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끝까지 그 목적지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두려움 등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 첫 부분에 보면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이런 말씀을 여러 번 반복하십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겠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항상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자신을 떠나 버리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계속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하니까 두려워 말고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실천 지침을 주십니다.

아무리 어떤 말들이 좋아도 그 말들을 내 안에 기억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그 말들이 우리 가운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 이런 실천 지침을 주셨습니다.
1. 강하고 담대하라. (마음에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신 거죠.) (1:7)
2. 율법을 지켜 행하고 그대로 따라함. (율법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난 가운데 어떻게 승리하게 하셨는가,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셨는가가 기록되어 있죠. cf.물론, 여기서 율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면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확신을 갖고 살 수 있는 것이죠. (1:9)

세상에서 익숙한 곳에서부터 떠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도우심을 의지하며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그 안에서 용기와 힘을 가진다면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로 가는 이 인생의 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따라 사는 삶 이 삶이 바로 생명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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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정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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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사람들이 이런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이야기...
우리는 주변에서 참 안타까운 일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자식을 보고 싶은데 자식과 떨어져 지내는 이야기들... 특히, 전쟁의 참화 속에서 자식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는데도 도와줄 수 없는 것을 보며 극심하게 울부짖는 부모의 모습들...
이런 것들을 대하면 우리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표현을 쓰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창세기의 생명 나무 열매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그 안에 아담과 하와를 두시며 모든 것들을 다스리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보면 그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에 대한 명령을 어깁니다. 창세기 2:17
어떤 사람들은 선악과를 왜 만드셨느냐? 이게 실제로 존재했느냐라고 따지기도 하지만, 이것은 성경의 주관심사가 아닙니다. 단지, 인간이 반역했고,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왜 죄를 어기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면
3:5절에 뱀(사단)이 속였습니다.
어떤 것을 미끼로 하였냐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하여 속였습니다. 그리고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선악과는 제가 생각하기에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를 상징합니다.
한계가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좋습니다. 누구의 보호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며 그 보호자 아래서 보살핌을 받는다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호의 테두리였습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보호자였습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으면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려고 했던 것은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는 것을 떠나려는 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관계의 단절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은 지옥과 같은 상태입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반역의 마음을 갖고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셨습니까? 정말 너무나 화나고 멸하시려고 했다면 가죽옷을 입혀서 쫓아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시고 가죽옷을 입히셨습니다. 3:21

하나님이 왜 에덴 동산에서 그들을 쫓아보낼 수 밖에 없었을까요?
그 이유는 창세기 3:22 에 나옵니다.
1. 죄를 범해서
2. 생명 나무 열매도 먹고 영생할까봐...

하나님은 인간이 영생 하는 것에 대해 시기하시기 때문에 쫓아내셨을까요?
절대 그것이 아닙니다.

죄로 오염된 사람은 결코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상태로 영생나무 실과를 먹게 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하겠습니까?
상식적으로 본다면 죄 상태에서 영원한 상태로 지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영원토록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위에서 언급했던 지옥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과 함께 하며 모든 것을 누리고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죄가 없어야 합니다.
죄가 없기 위해서는 죄에 오염된 것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옛 사람은 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이 옛 사람이 죄와 함께 그리스도로 인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에서 깨끗해 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명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한 이유로 하나님이 시기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위에서 언급했습니다.
그에 대해서 어떤 분은 그건 추측이 아니냐? 그렇게 이야기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근거가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게 된 자, 죄가 사하심을 받은 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생명 나무 실과를 먹게 될 것이라고 요한 계시록 22: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개역한글이나 개역개정의 의미는 원어에 비해 다소 추상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가 없어졌으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에 따라 생명 나무 실과로 상징되는 영원한 생명 속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하는 천국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단의 꾀에 넘어가 죄로 타락한 우리들에게 이런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의 소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적용점들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죄를 끊을 수 없습니다. 죄 속에서 계속 거하는 것은 사단에게 지배 당하며 하나님과 단절되는 지옥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의 결과들이 오늘날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사단은 우리를 멸하려 하고 죽이려 하고 속이려 하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나쁜 생각들이 너는 쓸데 없는 존재다. 죽어버려라하고 유혹하고 있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며 하나님의 모든 것이라고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이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 것은 바로 우리의 생명의 물줄기가 생수의 근원에 연결되는 것과 같습니다.
죄 속에서 하나님과 단절되었지만 예수를 받아들이면 우리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우리의 죄된 옛사람이 죽으며 하나님과 연결되는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로 인해 얻어진 새 생명,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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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정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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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길 가면서 생각들을 해 본 것이 있어서 적어봅니다.
얼마전에, 신대원 동아리 아나톨레에서 담당 간사 목사님께서 하신 이야기가 많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이 나왔을 때, 친히 그들의 병을 고쳐주시면서 그들의 연약함을 담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전엔 장애를 가지셔서 휠체어 생활을 하시는 한 목사님이 채플에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은 누가복음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은 그냥 병들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솔직한 상태가 기록되어 있다고... 거기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까지 자신의 상태에 대해 포장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말씀...

그러면서 내 자신을 한 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주변에서 누가 가난하다고 병들어 아프다고 하면 뭐라고 하나?
흔히 쉽게,
기도하겠다, 그런 가난함들에는 병듦에는 다 영적인 의미가 있으니까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 이런 말을 너무나 자주 해 왔던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예수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이 찾아왔을 때  육체적인 것이 낫는데 관심을 가지지 말고 영적인 것에 더욱더 관심을 가져라 이렇게 하셨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직접 병든자를 고쳐주시고 또한 영적인 의미도 일깨워 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누가 힘들다고 하면 영적인 의미를 부각시키는 형태의 영지주의(육에 속한 것은 무조건 나쁘고 영에 속한 것만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형태의 사상)에 물들어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성경의 가르침은 영적인 것 뿐만 아니라 육적인 우리의 생활도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성육신의 비밀이 여기에 감추어진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실현하기 위해선 실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을 돕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야고보서도 이런 맥락에서 가난한 자를 직접 돕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이 기독인들의 목표라면
영육간의 조화가 나타나도록 이 땅 가운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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